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단편적인 이야기들, Nowhere Man.
나에겐 고질적으로 뿌리내린 두 가지 버릇이 있다. 하나는 수집벽, 다른 하나는 방랑벽. 이 둘은 물과 기름 같은 관계일까, 아니면 생각보다 잘 어울리는 조합일까. 각자의 생각이 궁금하다.
멀리 떠나고 싶어진다. 한 장소나 공동체 안에 오래 머물다보면 그곳에 잘 속하지 못하는 내 모습을 찾게 되고, 결국 도망치고 싶어진다. 하지만 그렇게 멀리 도망친 곳에서도 역시 소속되지 못하는 나를 마주하게 된다. 그래도 발자국이라는 건 지워지면서도 어딘가엔 남는 법이다. 그렇게 떠돌다 보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의도든 아니든 간에 모으는, 수집하는 것들이 생긴다. 그것들을 어디엔가 정리해두고 싶지만 떠돌이에겐 그조차 쉽지 않다.
방랑과 수집, 이 둘은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일까? 아니면 서로 잘 어울리는 위스키와 탄산수일까?
두 가지 버릇을 같이 가지고 사는, 산만하고 어쩔 수 없는 나를 세상과 연결하기 위해 선택한 언어가 ‘사진’이었던것 같다.

128장의 사진으로 구성된 사진집. 앞면도 뒷면도 없는 북디자인. 148mm × 210mm
작품을 만드는 것만으로 밥벌이가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정말 하드코어하다. 전략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안 된다. 이제 막 시작하는 입장인 무명 작가에게는 배경을 하나하나 설명할 시간도, 그것을 듣고자 하는 사람도 많지 않다. 게다가 ‘전시’라는 형식은 물건이 늘어나기 때문에 머무름에 연연하지 않고 때가 오면 가볍게 떠나고 싶은 나와는 잘 안 맞는다. 하지만 감동이라는 경험에는 어딘가에 물질적인 실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했다. 그렇다면 책은 어떨까? 그렇게 고민하여 만든 것이 연초에 선보인 사진집 『Nowhere Dreamism』이다.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 존재.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존재. 「No-where」를 염두에 두고 지은 제목이었지만, 몇몇 독자는 그것을 「Now-here」라고 읽어주었다. 그것은 오독이었다. 작가는 의도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오독은 내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오독과 오해를 하더라도 책 한 권으로 연결되어 관계를 맺는 것.

사진집이 완성되고 나서, 이 사진집을 건네기 위한 여행을 떠났다.
책을 중심점으로 삼아 먼 곳으로 여행을 떠났다.
멀리 여행하는 사람은 정말 많은 이야기를 듣고, 들려줄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들지만, 분명 사람, 사물, 사건 사이의 공통된 무언가를 엮어내는 감각만큼은 더 정밀해지는 것 같다. 그 사이에 경계 속에서만 일어나는 세상의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발견 같은 것이 있다. 다른 이에게 설명하기 어렵다는 점에서 「우물 안 개구리」라는 말이 떠오르지만, 정작 우물 밖으로 나온 개구리들도 결국 「세상을 본 개구리」끼리만 친구가 되는 게 아닐까. 그곳에서의 기억, 기록, 만남, 재회, 그것들은 모두 나에게 있어서 No-where이자 Now-here의 감각으로 엮여져 간다.
「또다시 마주하고 엮어가는 이야기 (상), (하) 」편에서는 그 단편, 단편의 힘을 믿으며, 기억의 조각과 사진을 게재하고자 한다.
장소가 다르고 시간이 달라도 보이는 공통점, 법칙이 느껴진다면 기쁠 것이다. 다음 작품이「Nowhere Everywhere」이라고 할 수 있는 세계로 확장되길 바라고 있다.

먼 경치(遠景)에 대한 동경(憧憬), 8월 14일 서울
초등학교 시절, 내가 가장 좋아한 과목은 역사였다. 그 다음은 국어. 수학은… 일찍이 포기한 과목이었다. 미술은… 지금 생각해보면 그림을 바라보는 건 좋아한 것 같다. 단지 손재주가 없었을 뿐. 사진도 미술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면 작가가 되기 위한 좋은 진로를 선택할 수 있었을까?
어쨌든 나는 이야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역사라는 이야기.
예를 들자면 나는 딱히 공부하지 않아도 수업 시간에 들은 내용만으로 역사 시험에서 100점을 맞을 수 있는 아이였다. 무작정 외우기보다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즐거웠다. 나에게 역사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였다. 고조선에서 시작해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로 이어지는 이야기. 그러다가 가을쯤이 되면 일제강점기 페이지로 들어간다. 그 시간이 너무 고통스럽다.
“쪽바리.” “매국노.” “X새끼'`” “X발.”
의미는 알지만 누구를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들이 교실을 어지럽히고, 내 마음은 조용히 아파온다. 마음이 아프다. 소리 내어 말해선 안 될 것 같은 감각. 그럴 때 나의 도피처는 아침 자율 독서 시간에 읽던 세계 일주를 떠난 여행자들의 에세이였다. 수평선, 지평선을 향한 이유 없는 막연한 동경이 있었다.
하지만 인생을 살다 보면 아프더라도 마주해야만 다음으로 나아갈 수 있는 순간이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 이제는 스스로 그런 순간을 마주할 수 있는 강인함이 생긴 것 같다. 그 하나하나의 순간마다 마음속 뿌리가 점점 더 깊어졌고, 덕분에 지금까지도 신기루 같은 ‘희망’이라는 빛을 바라보며 살아갈 수 있게 되었다. 어둠 속에서, 목적지가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희미하게 빛나는 등대를 향해 걸어가는 기분이다.
우리는 서울의 일본식 이자카야에서 하이볼을 마셨다. 한국에서는 하이볼에 소다 대신 토닉워터를 넣어서 약간 달달한 맛이었다. 나는 쓴맛을 더 좋아해서 탄산수를 섞은 일본식 하이볼을 더 좋아하긴 하지만.
우리는 그냥 요즘 살아가는 고민이나 생각하는 것, 사회에 대한 불만 등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솔직히 대화의 내용은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그가 툭 던진 몇 마디 말, 그리고 우리가 좋아하는 음악이나 존경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만 희미하게 남아 있을 뿐이다. 우리는 알딸딸한 상태로 이태원을 함께 걸었다.
그러다 문득 나는 물었다.
“앞으로 서울은 어떻게 변할까?”
그가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대신 또렷이 기억에 남은 것은 그 순간 화려하고 정보량이 많은 네온사인으로 물든 이태원 거리를 맥주 캔을 들고 걸었던 장면.

그 이후로는 가끔씩 한국에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25년 3월, 서울에서 하루 동안 촬영한 사진의 일부.
번역은 의도를 매개하는 일이다, 4월 13일, 30일 교토
나는 원래 대학을 졸업한 뒤, 교토를 시작으로 해외 진출을 시도하고 있는 조금 규모가 있는 커피 브랜드에서 일하고 있었다. 맡은 일은 로스팅, 원두를 굽는 일이었다. 그곳에서 약 2년 정도 근무했다. 기본적으로 매주 수십 잔의 커피를 테이스팅해야만 했다. 그 커피 생두를 관리하는 것도 내 일 중 일부였다. 생두는 당연히 바다 건너에서 온다. 그러니 통관 작업도 해야 하고, 책상 앞에 앉아 하는 사무 업무도 봐야 했다.
어느 날, 에티오피아산 생두가 담긴 마대 자루 안에서 청바지 지퍼 조각을 발견했다. 사실 마대 자루 속엔 이런저런 이물질이 꽤 섞여 들어가 있는 편이다. 나무나 돌은 흔한 편이지만, 지퍼 조각이라니. 아마도 어느 농부의 청바지에서 떨어진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 순간, 이상하게도 조금 기뻤고, 그 조각을 작은 유리병에 담아 방에 두었다.
나는 예전부터 커피가 하나의 매개체가 될 수 있다고 믿어왔다. 일종의 ‘장(場)’을 창조하기 위한 수단이랄까. 하지만 일이란 게 늘 그렇듯 현실의 업무와 내 안에서 그려보는 비전 사이에는 어느 정도 괴리감이 있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2025년, 내가 일했던 커피 회사가 KYOTOGRAPHIE와 컬래버레이션을 하게 되었다. KYOTOGRAPHIE 관련 갤러리에서 기념으로 판매할 커피 원두를 제공하게 되었고, 카페에서도 사진작가분들의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KYOTOGRAPHIE 공모 작가의 전시에 기획 운영으로 참여하게 되면서, 한 작가님을 인터뷰하게 되었다. 작가 Yen 씨는 대만어로 이야기했고, 일본어에 약간 대만 억양이 섞인 통역가분이 일본어로 통역해주었다. 그 내용을 바탕으로 내가 일본어 기사를 작성했고, 그 글을 다시 번역가 Aya 씨가 일본어에서 영어로 옮겼다.
번역을 단순한 ‘언어의 유통’이라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을 체감한다. 번역은 단지 말을 컨베이어 벨트 위에 올려 흐르게 하는 작업이 아닐 것이다. 번역된 언어 안에는 작가의 말, 번역가의 말, 그리고 작가도 번역가도 아닌 어떤 존재의 말이 섞여 있다. 일을 하다 보면 명시적으로 설명되는 역할 너머, 그 뒤에서 움직이는 사람들의 존재감을 느낄 때가 있다. '번역은 개입하는 일이다' 문득 이런 말을 해보고 싶다. 혼자서 번역가의 역할에 대해 되짚어보던 중 떠오른 생각이다.
전시 기록사진 촬영, 스기우라 마사타카(杉浦大貴)
나는 대학 시절 잠깐 간체자(簡体字) 중국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 영향인지 몰라도 왜인지 yen 씨의 입에서 나온 ‘看(보다)’라는 단어가 귀에 맴돈다. 어쩌면 사진가로서 내 독단과 편견이 개입된 것일지도 모른다. Yen 씨의 사진 작품은 마찬가지로 가부장제가 여전히 남아 있는 대만 시골의 본가에서,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처음으로 어머니 혼자 요리를 하던 부엌에 들어가 어머니의 흔적을 사진에 담은 작업이었다. 어머니가 자주 사용하시던 타버린 냄비 바닥을 줌인해서 촬영해보니 마치 우주의 행성처럼 보여, 그 안에서 우주적인 규모감으로 어머니의 메시지를 느꼈다고 한다.
경계가 풀리는 그 순간, 비로소 보이기 시작하는 진실. 그렇게 남은 흔적을 응시함으로써 인간에 대한 애정이나 애증이 더 깊이 느껴지는 작품들. 그래서일까, 그의 착한 목소리 톤과 함께 ‘看(보다)’라는 단어가 계속해서 귀에 맴돌았고, 이런 편견 섞인 내용의 글을 나중에 작품 해설에도 쓰고 말았다.
자신의 미숙함을 느끼는 동시에, 왜 그렇게 충동적으로 글을 쓰고 말았는지를 반성해보았다. 원초적인 주제이긴 하지만, 예술 작품에 대한 객관적인 해설이라는 게 정말 존재할 수 있을까?
이런 원초적인 물음을 통해 고찰하는 방법은 때때로 부작용이 따른다. 근본적인 차원에서 너무 단언하는 것 역시 바람직하지 않다. 변화의 가능성을 놓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가능하다면 그 ‘사이’를 탐색하고 있다. 본질과 비본질적인 것, 이론과 실천, 객관성과 주관성의 그 사이를 오가는 나의 사고가 정말 존재하는지 자신은 없다. 아마도 그 사이란 하나의 고정된 점이라기보다는,어느 한 점에도 머물지 않고, 연기처럼 퍼지는 선이자 흐름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흐름을 조정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무의식이기에, 그 안에는 감정과 충돌이 스며들 수밖에 없다.이것이 나의 잠정적인 결론이다. 내가 충동적으로 글을 써버린 것은, 어쩌면 그 ‘사이’를 감각하고자 했던 본능적인 몸짓이었는지도 모른다.
충동조차, 때로는 주관과 객관을 넘나드는 사유의 흔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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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토의 한 출판사가 운영하는 갤러리, Purple Kyoto. 오늘은 통역 일 때문에 이곳에 왔다. 솔직히 긴장해서 손에 땀이 흘렀다. 일이니까 이런 말은 핑계지만 낯가림이 심하고, 특히 한국어를 말할 기회가 거의 없던 나로선 더욱 그러했다. 가끔 귀로만 한국어 콘텐츠를 접하는 정도였다. 듣기와 말하기/쓰기는 전혀 다른 작업이다. 이번엔 일본어로 듣고 한국어로 말하고, 혹은 한국어로 듣고 일본어로 말하는 이중의 작업이 요구된다. 나는 후자보다 전자가 더 어렵다. 한국어로 말하는 것이, 열다섯 살 때 한국을 떠나 일본으로 도망치듯 떠나 온 이후로 거의 9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익숙하지 않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80년대 유명 싱어송라이터 오자키 유타카의 「15の夜(15의 밤」이라는 곡을 참 좋아한다. 열다섯 살의 밤인지, 15일의 밤인지 사실은 모르겠지만.)
나의 한국어 실력을 예를 들자면 만약에 ‘에’와 ‘애’의 차이를 설명해 보라고 하면, 솔직히 모르겠다. 어렵다. 창피하다.
Yezoi 씨와는 그 출판 기념 토크쇼에서 처음 만났다. 『절기 Season, 2016』이라는 작품에서 그녀가 가족사에 대해 느끼는 애정과 애증,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사진이라는 신체 행위에 대하여 생각나는 것이 많았다. “사진은 진실을 담는다”라는 명제는 현대사진의 경우엔 이미 무너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집한다’는 의지와 ‘찍는다’는 신체적 행위 안엔 아직 작가의 진정성 같은 것이 남아 있다고 나는 믿고 싶고, 실제로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꼈다. 진정성이라는 것을 느꼈다. 뭔가 뭉클했다. 이런 말을 함부로 쓰면 그녀에게 실례일 수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3살 위의 형, 종환이 있었다. 형은 세상을 떠났다. 정확히 언제인지는 모른다. 2016년에서 2018년 사이였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본 건 2015년 여름쯤.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당시 우리 집안은 난장판이었고, 나는 거의 도망치듯 일본으로 이주했다. 그러니 유학을 축하하는 분위기 같은 건 없었다. 귀국할 일이 없는 유학, 그 후 나중에는 한국 국적을 포기하였다.
② 2023년에 찍은 나의 증명사진.
③ 유일한 고향 친구 T가 쓴 일기. 우리 집에서 자주 함께 놀았던 기억들이 담겨 있다.
내가 사진을 시작한 건 2019년부터다. 형은 분명 존재했었지만 내 안에는 형의 사진도, 이미지도 거의 남아 있지 않다. 다만 한 번, 형의 네이버 계정 비밀번호를 계속 틀려가면서도 간신히 들어간 적이 있다. 그 안에는 형의 ‘증명사진’이 있었다. 나에게 형이 존재했다는 걸 ‘증명해주는 사진’. 그리고 형이 초등학교 6학년 때 다문화 가정에 대해 인터뷰를 받은 기사가, 열세 살의 형 모습을 담은 채 인터넷에 게재되어 있다.
나에게 형의 흔적은 그게 전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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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기 Season, 2016』 안에서 Yezoi 씨가 언니와 어머니의 자는 얼굴을 찍은 사진이나, 언니의 배에 얼굴을 묻은 사진을 보며, 그런 사진을 찍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의 시선이나 애정을 일본어로 어떻게 전달해야 할지, 진심으로 고민했다. 나는 그녀의 말과 단어 하나하나의 문맥을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상처가 있는가.

내 어머니는 환갑이 넘었고 아직은 건강하신데, 라이트 로스팅 커피를 마시며 “시큼하네” “그게 요즘 트렌드야” 같은 대화를 나누며 디지털카메라로 어머니의 사진을 한 장 찍었을 뿐, 진심으로 찍으려 대하진 않았다. 남자애라서 그런가, 창피하다. 죄송스럽다. 눈을 마주 볼 수가 없다.
시선이란 것, 시학이라는 것.
일본에서 살면서도 어쩐지 정이 깊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이걸 굳이 한국 뿌리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타고난 무엇인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본에는 드라이한 관계, 웨트한 관계라는 비유가 있는데, 나는 웨트하고 쿨하지 못한 성격이다. 요즘에 인기가 있는 타입의 성격은 아니다.
나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가족사에서 도망치듯 단절하는 선택을 할 수 있었고(알에서 태어난 게 아니라 배에서 태어난 생물이라 가족사를 완전히 끊을 수는 없지만), 미움 이상의 사랑을 받아본 기억도 있다. 그것은 가족이나 가정이라는 틀을 넘어 존재하는 더 인간적인 사랑 같은 것이다.
문화연구자 야마모토 히로키 씨는 2024년 광주비엔날레 일본관 해설문에서 ‘한(恨)’을 ‘소리 내지 못한 목소리(声にならない声)’라고 번역했다. 그의 번역이 한국 사회의 문맥을 이해한 좋은 번역이라고 느꼈다.
Yezoi 씨의 토크쇼에서 그녀가 소개하는 그저 소리 내지 못한 목소리, 소리로서 들려지지 못한 목소리들, 그러한 목소리들의 주체에 대한 시선, 시학, 연민과, 함께 걷는다는 것, 그걸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잘 모르겠다. 통역가로선 실격일지도 모르지만 그런 심적 흔들림이 누군가의 내면에 여운이 되어 물처럼 잔잔히 퍼졌기를. 언어의 흔들림을 통해 현장의 공기나마 전달할 수 있었길 바란다.
그 후에 오랜만에 한국어로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읽었다. 일본어 원작 제목은 훨씬 추상적인 『노르웨이의 숲』. 한글의 글자가 가늘고 섬세하면서도 아름답게 빛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기분 탓이겠지만.
작가 소개
Jong
三浦 宗民, 미우라 소우민(구명: 고종민, 高宗民). 이름만으로도 이미 꼬리표가 붙는 사람. Jong 씨든, Jong 짱이든, 편하게 불러주세요.
2025년 현재는 교토를 거점으로 여행하며 사진을 찍고 있다. 사진론 연구와 통역・번역 활동을 통해 자아와 타자, 언어와 국가라는 경계를 탐색하고 허무는 실천을 하며, 사진을 통해 애정과 애증이 공존하는 삶을 살아내려 한다. 사진집 『Nowhere Dreamism』(2025) 출판.
@jong_lovecoffee
편집 도움
유승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