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방은 궁전》은 작년 여름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원룸형 오피스텔에서 열린 재훈의 첫 번째 개인전이다. 전시에 출품된 대부분의 작품은 사진 프린트를 주재료로 삼고, 오피스텔 안의 가구나 잉여 공간을 포함하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예를 들어, 전시와 동명의 작품인 <오래된 방은 궁전>은 옷장을 뒤집어 그 등에 한 장의 사진을 부착하는 식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게 생겨난 여덟 점의 작품은 전시가 열린 열흘 남짓한 시간 동안 선보여지고, 철거되었다.
그 작품과 전시를 만들었던 나는 전시가 끝난 후에도 작품들에 관해 생각했다. 반복해서 생각했다. 같은 기억을 반복하다 보면 그 기억에는 현재의 잔여물이 퇴적되어 실제보다 더 큰 공간이 만들어지곤 한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그 방의 상주자인 나는 이 글을 통해 그 속에 있던 여러 사물 중 <오래된 방은 궁전>을 이루는 사진을 꺼내어 함께 보려 한다.
기억의 씨앗은 그것이 도착해야 할 사람들을 향해 떠나 가야 하듯이, 한 장의 사진 <오래된 미인의 얼굴>은 작품과 전시로부터 떨어져 나와 그와 외형적으로 유사한 세 장의 사진과 함께 놓일 것이다.
(1) 영국의 여성 참정권 운동가 Emmeline Pankhurst(1858-1928)가 공무 집행 방해로 인해 처음 수감되었던 때의 모습으로 추정되는 사진
(2) 미국의 사진작가 Sally Mann(1951-)이 시골 오두막집에서 가족과 보냈던 수년의 여름 간 자신의 딸아이를 촬영한 사진
(3) 뉴욕에서 활동하는 작가이자 스타일리스트인 Fern Cerezo(1994-)가 스튜디오에서 스타로 분장한 자신의 모습을 촬영한 셀프 포트레이트
위 세 장의 사진은 각기 다른 시대적 배경과 개인적 필요 아래 만들어졌지만, ‘여성’과 ‘자유’라는 두 가지 단어 사이의 교집합을 넓혀온 사람들을 증언한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 동맹의 한구석에 나의 사진을 기입한 이 글이 <오래된 방은 궁전>에 관한 안내서이자 작은 여성사로 읽힌다면 기쁠 것이다.

출처: 『The Suffragette』, Sturgis & Walton Company, 1911, p.330
영국에서 여성이 처음으로 제한적인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 해는 1918년이다. 그 이전까지 투표권은 특정한 직업 혹은 일정 수준 이상의 재산을 가진 남성에게만 보장된 권리였다. 21세 이상의 성인 모두에게 성별을 불문하고 동등한 투표권이 부여된 것은 1928년 국민평등선거법 제정 이후로, 지금으로부터 채 100년이 안 된 일이다. 이 변화는 남성 관료들의 시민 의식이 자연스레 성장함에 따라 이뤄진 진보의 발자국이 아니다. 여성 참정권이 보장되는 미래를 역사적 필연으로 인식한 수많은 여성 운동가가 영민하게 싸워 거머쥔 승리이다.
위 사진에 등장하는 Emmeline Pankhurst(1858-1928)는 영국의 대표적인 여성 참정권 운동가다. 14세에 여성 참정권 운동에 입문한 그녀는 여성 참정권 협회부터 독립노동당까지 다양한 운동 단체에서 활동하고 탈퇴하며 ‘여성 투표권 획득’이라는 목표에 부합하는 운동 방식을 고민하게 되었다. 그 실천으로, 그녀가 1903년에 설립한 여성사회정치연합WSPU는 ‘말 대신 행동’이라는 표어와 함께 무력시위를 전개하였다. 공기관의 창문에 돌을 던져 깨뜨리고, 우체통에 폭탄을 넣어 터뜨리며, 미술관에 전시된 그림을 칼로 난도질했고, 경마장 한복판으로 들어가 국왕의 말 앞에서 투신했다.
WSPU나 여성 참정권 운동가들이 처음부터 무력적인 수단을 써 온 것은 아니다. WSPU의 직접 행동이 본격화됐던 1908년으로부터 약 40년 전, 민간 운동가와 런던 여성 참정권 협회 등은 청원과 서명 운동, 집회와 강연과 같은 합법적인 수단을 통해 목표를 이루고자 했었다. 하지만 영국 하원에서 그들의 청원은 중요한 의제로 다루어지지 않고 무시당했다. 물론 WSPU의 운동도 설립 직후 5년까지는 법의 울타리를 존중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 하지만 그 결과, 무시당했다. 심지어 정부의 철저한 무시에 항의하기 위한 시위에서 Emmeline은 하원에 진입하기도 전에 경찰관 업무 방해 혐의로 체포된 후 수감된다. 이를 계기로 WSPU는 그들의 운동 방식을 정부로 하여금 여성의 자유와 여성의 죽음, 둘 중 하나를 선택하게끔 압박하는 쪽으로 공식화한다.

무력시위에 가담한 여성은 경찰에 체포되어 감옥에 가곤 했다. 처음 수감됐다가 석방한 운동가에게는 꽃을 주며 격려하는 문화가 생겼을 만큼 많이 갔다. 하지만 여성들은 자신을 국민으로 인정하지 않는 정부에 의한 투옥에 동의하지 않았다. 감옥에서의 단식 투쟁은 여성들이 자신의 불복종과 항의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방법이었고, 수많은 여성이 아사에 이를 때까지 음식을 거부했다. 그리고 정부는 그렇게라도 본인의 뜻을 관철하고자 하는 여성들에게 강제로 음식을 먹였다.
팔다리를 구속하고, 다문 입을 개구기로 열어, 숟가락에 담긴 음식을 집어넣거나 우유, 계란, 육즙 등을 섞은 액체를 튜브로 콧구멍에 주입했다. 이러한 비인도적 강제 급식이 수감자들이 갇혀 있는 독방에서 차례차례 이루어졌고, 그때마다 그들의 거친 반발과 비명이 교도소에 울려 퍼졌다. 하루에 두 번 이상 반복된 이 끔찍한 풍경은 여러 여성에게 신체적, 정신적 트라우마가 되었다. 이 모든 폭력은 ‘여자도 한 명의 인간으로서, 한 명의 시민으로서 투표하고 싶다’는 주장이 감당해야 했던 몫이었고, 지금으로부터 고작 100여 년이 조금 지난 과거에 일어난 일이다.
사진 ‘Emmeline Pankhurst in prison’ 속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도 보이고, 사진 촬영을 위해 멈춰 서 있는 것 같기도 하며, 자기 삶과 사회의 다음 모습을 맞기 위해 현재를 인내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그 기다림에 응답하듯, 이 사진이 촬영된 때로부터 약 100년 후에는 그녀의 자서전인 「My Own Story」를 기반으로 제작된 'Suffragette'라는 영화가 개봉하기도 했다. 17년 차 세탁 노동자이자 24살의 여성인, 영화 속 주인공 Maud Watts는 여성에게 투표권이 없다는 사실의 의미를 알아가는 과정에서 남편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만약 내가 (아들이 아닌) 딸아이를 낳았다면 그 애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 남편은 대답한다. “당신과 똑같은 삶을 살았겠지.”
그 당시 여성들에게 예정된 절망적인 미래를 선연히 통보하는 이 답변은 그녀가 그 이후로 스스로를 여성 참정권자로 정체화하는 데에 큰 동기가 된다. 수많은 (그러나 대체로 평범한) 여성 참정권 운동가 중 한 명인 Maud의 입장에 이입하며 영화를 보던 나에게는 어느덧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들었다. Emmeline과 다른 여성 운동가들이 보여준 굳센 투지 역시 Maud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이와 같은, 미래의 자신을 돕기 위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 Sally Mann
Sally Mann(1951-)은 Emmeline이 죽은 후 한 세대가 지나가던 시점에 미국의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사진작가다. Sally는 Emmeline과 같은 페미니스트들이 넓혀 놓은 사회 속 여성의 자리에서, 의사이자 예술 애호가였던 아버지 Robert Munger에게 큰 영향을 받으며 유년을 보냈다. Robert는 어린 Sally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책을 읽어주고, (아마추어 사진가로서) 그녀의 사진을 찍어주며, 첫 번째 카메라를 선물했다. 그리고 카메라를 선물 받은 직후 Sally는 사진과 사랑에 빠진다. Robert는 예술에 대한 그녀의 애정 역시 한껏 지지해 줬고, 그 덕분에 그녀는 대학에서 사진과 예술을 공부한 후 현장에서 사진가로서 일하며 예술가로서의 커리어를 천천히 쌓아갔다.
<Jessie at 6>가 수록된 『Immediate Family』는 그녀가 발간한 세 번째 사진집이다. Sally는 1984년부터 1991년 사이에 버지니아주의 산기슭에 있는 여름 별장에서, 스스로 꾸린 가족과 함께 머무르며 자신의 세 아이 Virginia, Jessie, Emmett을 촬영했다.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 늘 카메라와 함께해온 Sally와, 그녀의 가족에게 사진은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산들바람과 같았다. 그 바람의 결과물인 『Immediate Family』 속 사진에는 목가적 풍경에서 무릇 기대되는 이완된 분위기와 자연 속에서 뛰노는 아이들의 모습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일어나는 사건·사고 등의 가족 일상이 있는 그대로 담겨 있다.
하지만 그 솔직함으로 인해 Sally는 커다란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Immediate Family’를 이루는 총 63장의 사진 중 13장의 사진에 자녀들의 맨몸이 포함됐다는 이유로, 아동을 성적으로 대상화하여 장사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세간의 질타를 받았기 때문이다. Wall Street Journal의 Raymond Sokolov는 당시 네 살이었던 Virginia가 담긴 사진에서 그녀의 알몸만을 크롭해 눈과 가슴, 생식기 부분만 검정 박스로 가려 그녀의 사진을 전형적인 외설로써 제시했고1, The New York Times의 Richard B. Woodward는 Sally가 아이들의 알몸 사진을 (소아 성애가 존재하는) 이 세상에 공개함으로써 자신의 아이들을 알면서도 위험에 빠뜨린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2
Sally의 사진이 외설이라는 주장은 차치하더라도, 그것이 아이들을 위험에 빠뜨리는 일이라는 지적은 꽤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나 역시 그녀의 사진들을 처음 봤을 때 아름다움을 느낌과 동시에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진 속 저 아이는 여자가 무엇인지 모르고, 사진이 무엇인지 모르고, 여자의 몸이 남자들에게서 어떻게 유통되는지 모른다. 사진이 발표된 직후 Sally의 사진은 1년 이내에 300장이 넘는 인화 주문을 받았는데, 이는 현재 가치로 약 20억 원에서 22억 원 정도가 되는 금액이다. 그녀의 사진을 매력적으로 느끼게 하는 요인 중 하나가 (그녀의 사진에 포함된) ‘아동 누드’라는 금기라는 점에 대해서, 그 누가 단호하게 부인할 수 있을까?
이 점을 인지하고 있던 Sally 역시 아이들의 사진을 촬영 직후가 아닌 (아이들이 더 성숙한 판단을 할 수 있을) 10년 뒤에 발표하기로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Emmett과 Jessie는 그 일방적인 지연 발표 결정에 관해 화를 냈다. Sally만큼 일상 속 사진 촬영의 과정을 좋아했던 그들이었으니 그 결과물을 공개하는 일에 대해 자신들과 상의하지 않았음이 서운했던 듯싶다. 이에 Sally는 아이들이 자신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심리학자의 소견을 구하고, 미래의 아이들이 이 사진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하게 될지 상의했다. 아이들에게 첫 번째 애인이 생기고, 뜻 맞는 이와 결혼을 하게 되고, 자식이 생겼을 때 이 사진에 대한 그들의 시선은 지금과 어떻게 달라질지에 관해 대화했다. 1992년에 이루어진 ‘Immediate Family’의 발표는 이와 같은 숙고를 거쳐 나온 결정이다. 이 선택은, 그 옳고 그름을 논하기에 앞서, 그 과정에 (다 합쳐 30살이 채 안 되는 세 명의 어린이) Emmett, Jessie, Virginia의 자기 운명 결정권이 최대한 존중됐다는 점에 그 의의가 있다.

Ⓒ Sally Mann
‘당신의 사진은 아이들의 실제 삶을 얼마나 반영하는가?’라는 질문에 Sally는 흥미로운 대답을 남긴 바 있다. “어쩌면 나는 (내 아이들의 사진을 찍는 일을 통해) 나 자신의 과거를 촬영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내 어린 시절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어 아버지가 찍어준 나의 사진을 통해 어린 시절을 기억하기 때문이다.”3 이 말을 듣고 나면 Sally가 자기 아이들의 사진을 촬영하는 일은 자신의 아버지가 어린 시절 자신을 촬영해 줬던 습관을 그녀가 물려받은 것처럼도 느껴진다. 이 감상을 Sally의 표현으로 옮겨 적어 본다면 다음과 같다.
“나는 내 아이들이 나의 특이한 사랑 방식4을 물려받는 일을 도울 것이다. 내가 나의 부모님 고유의 사랑 방식 - 아마도, 자식의 사진을 찍어 주는 일 - 을 물려받는 데에 성공했듯이. 당신들도 당신의 방식을, 의심하지 않고 살려 나갔으면 한다.”5

Ⓒ Fern Cerezo
<Jessie at 6>가 Sally Mann과 그녀의 딸 Jessie가 함께 만들어낸 결과물이라면, Fern Cerezo(1994-)의 셀프 포트레이트 <Premiere>은 Fern이 연출과 촬영 그리고 모델을 맡으며 혼자서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이 사진에서의 Fern은 사진이 무엇인지, 여자란 어떤 선택으로 이루어진 문화적 환상인지, 자신의 욕망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전략가이자 전사처럼 보인다. 모델이 원하는 스스로의 정체성이 네모난 프레임 안에 묵직하게 연출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성애자 신부의 전유물인 웨딩드레스를 남자 출신의 몸이 입음으로써 자신이 지향하는 성별 정체성 혹은 섹슈얼리티를 드러내며, 그 표현의 이면에는 (삶의 다음 단계로 이행함으로써) 행복이라는 감정을 획득하고자 하는 결연한 의지가 느껴진다. Fern은 이 사진에 등장하는 자기 자신을 ‘스타 - 자기 삶의 주인공’이라고 부르며 이미지와 힘에 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덧붙인다.
“스타는 카메라를 존중할 만한 적으로서 간주하며, 그것의 힘에 관해 충분히 인지한 채로 응시한다. 순진한 소녀는 자기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를 다른 이들로부터 지시받겠지만 스타는 스스로가 스스로를 결정한다.
(...)
몸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은 결코 잊혀지지 않을 테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세상에게 우리의 몸을 바라보는 방법을 알려줌으로써 우리 이미지에 대한 지배권을 되찾아오지 않는 것인가? 스타는 조명이 비추는 가운데 자리에 서서 기꺼이 자기 삶의 주인공이 되고자 한다.”6
우리는 위 발언으로부터 자신의 몸과 운명에 대한 주도권 요구를 또렷하게 들을 수 있다. Fern은 춤을 출 때나 섹스를 할 때 자신의 몸에 (마술처럼) 연결되는 듯한 감정을 느끼고, 그 감정을 무대나 사랑하는 사람 없이도 느끼기 위한 수단으로써 사진을 사용했다고 한다.7 그렇다면 <Premiere>는 Fern이 스스로와의 긴밀한 대화를 통해 상징계의 폭력으로부터 재해석한 자신의 몸을 사진의 언어로써 주장하는 작품일 것이다. 그랬을 때 이 작품은 나에게 흡사, 성인이 된 Jessie가 엄마인 Sally 없이도 <Jessie at 6>에서의 자기 맨몸을 다시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겠다고 결심하는 용기처럼도 느껴진다.

Ⓒ Fern Cerezo

Ⓒ Fern Cerezo
<Audition>은 <Premiere>와 쌍을 이루는 또 한 장의 사진 작품이다. 조명도 의상도 화장도 자아도 한껏 힘준 듯한 <Premiere>에서의 Fern과 달리 <Audition>에 담긴 Fern은 촌스러운 지망생의 긴장감을 역력히 드러내고 있다. Fern은 작품 소개 글에서 <Audition> 속 자기 자신을 ‘유년기에 2차 세계대전을 겪고 피난민 생활을 했던 Audrey Hepburn이나, Marilyn Monroe가 되기 전 양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자라온 Norma Jean이 의상실에서 오디션을 보는 상황’8에 겹쳐본다. 아무것도 없던 순진한 소녀가 꿈을 좇아 영화의 중심에 서서 수많은 이들의 환상을 투사 받으며 어둠에서 빛을 비추는 스타가 되는 것이다.
이같은, 불우했던 일반인이 오디션을 통해 스타로 거듭나는 성공 서사는 이유 모를 슬픔을 앓는 젠더 아픔이가 비/수술 트랜지션을 통한 성별 정정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는다는 정체성 투쟁기와 유비를 이룬다. Fern은 평소 인스타그램을 통해서도, 다양한 의복을 활용하여 자신의 관능적인 모습이 담긴 셀카를 게시하곤 하는데, 이와 같은 ‘(주어진) 각본 다시-쓰기’의 목표가 개인의 자기 탐구를 넘어 미디어에서 비극이나 조롱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퀴어들의 몸을 매력적인 위상으로 뒤바꾸는 것이라고도 표명한다.9
여기서쯤 나에게는 세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첫째, 실로 대단하고 응원받아 마땅한 도전이다.
둘째, 주제/이미지로서의 퀴어를 자기 컨텐츠에 포함하고 어필하려는 동시대 문화예술의 시류에서 Fern의 작업은 (수많은 퀴어적인 것 중) 그 시류가 승인한 ‘퀴어 - 몸 - 이미지’를 대중적인 섹슈얼리티 모델에 등재하고자 하는 실천으로도 다가온다.
셋째, 세상 모든 젠더 아픔이들이 Fern처럼 육감적인 모델이 되는 방식으로 자신의 낙인을 극복할 수는 없을 것이다. 개개인의 조건과 존재 방식은 모두 다르니까. 그렇다면, Fern처럼 못하는 아픔이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받아들이며 자유스러워질 수 있을까?

Ⓒ 재훈
Fern Cerezo의 첫 번째 꿈은 자신의 고향 뉴저지를 떠나 뉴욕으로 이사하는 것이었고, 재훈(1999-)의 첫 번째 꿈은 전라남도 화순군 능주면의 기숙사 고등학교에서 탈출하는 것이었다. 재훈이 청소년기의 끝자락을 보낸 능주고등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오전 6시 20분에 기상해 오후 11시에 취침에 들 때까지 대학 입시를 위한 공부에만 매진하게 하는 교육 기관이었다. 그곳에서는 2주에 한 번씩 돌아오는 정기 외박을 제외하고 학교 바깥으로의 외출이 금지되며, 핸드폰 사용은 불법이다. 남녀 공학이지만 연애를 하면 성적이 낮아질 것을 우려하여 남녀 분반 제도를 채택했으며 3개의 남자 반과 3개의 여자 반 사이에는 - 흡사 파놉티콘과 같은 - 교무실이 자리 잡고 있다.
학교에 비자발적으로 입학한 재훈은, 입학 첫날 오후 11시까지 진행되는 야간 자율학습에 참여한 이후 이곳은 뭔가 단단히 잘못됐다고 직감한다. 자신과 비슷한 생각을 가진 동료들을 만나 하루 종일 운동장만 걸었던 1학년 1학기부터 미국으로의 유학이 좌절된 2학년 1학기까지, 그는 노예 같은 입시 생활을 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시도했지만 계속해서 실패했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도 스스로 원하지 않는 생활을 할 수밖에 없다는 현실을 깨닫는다. 그 이후로 재훈이 선택한 존재 방식은 바로 자신의 삶에서 현실의 비중을 최소화하는 것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에 진학한 그는 새 학년마다 해왔던, 같이 다닐 무리를 찾는 일을 하지 않기 시작한다. 현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늘 시시하고 체제 순응적이었기에, 무단 외출하여 다운로드 받아온 예술가들의 창작물이나 인터뷰 그리고 포르노를 보며 하루하루를 버텼다. 그렇게 현실을 외면했다. 문과생이었던 반 친구들이 TV로 뉴스나 각종 시사 프로그램을 볼 때도 그는 저 소식들이 자기와 상관없는 것이라고 여기며 무시했다. 뉴스에서 중계되는 한국의 현실이 미래의 자신에게 어떻게 엄습하게 될지 꿈에도 모른 채로 말이다.
*
재훈이 고등학교에 재학하던 2010년대 중후반은 한국에서 페미니즘의 대중화가 이뤄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청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강남역 살인사건이나 미투 운동 등이 소셜 미디어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을 통해 문제시되며 그간 공적 공간에서 쉬쉬대 왔던 성폭력과 성차별이 의제화되었다. 검찰계, 정치계, 법조계, 기업계, 종교계, 연예계, 영화계, 연극계, 문학계, 미술계, 사진계, 체육계, 교육계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수면 아래 놓여있던 성폭력 사실이 수많은 가해 고발인에 의해 폭로되었기 때문이다.
일례로, 서지현(1973-)은 자신의 상사였던 안태근에 의해 강제로 추행당한 사실을 공론화함으로써 미투 운동의 기폭제가 된 전직 검사이다. 2018년 1월 29일 그녀는 자신이 속한 조직인 검찰의 내부망 게시판에 한 게시글을 업로드한다. 자신의 피해에 관한 고백과, 이 고백이 조직의 발전에 이바지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이 담긴 글이었다. 미래의 범죄에 용기를 주지 않기 위해10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기로 했다고 말하는 그녀는, 자신이 입은 것과 같은 폭력으로부터 자신의 조직이 지켜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맺는다. “나는 소망합니다. 우리가 국민의 사랑과 신뢰를 받는 검찰, 진정 정의를 실현하는 검찰로 우뚝 서기를.... 저는 아직도 검찰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불가능해 보이는 희망을 이렇게 품고 있으니 말입니다.”
이로부터 4년 뒤, 서지현은 별도의 사전 안내 없이 명예퇴직을 통지받는다.
첫 문단에 나열했던 ‘계’들의 목록이 수없이 길다는 점에서, 우리는 이 문제가 단지 검찰이란 단일 조직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권력형 성범죄는 한국 사회 대다수 조직의 수직적 구조를 악용하여 만연해 온 음성적 문화이며, 그것이 가진 유일한 인구학적 특징은 가해자의 성별이 대개 남성이라는 사실이다.11 근본 사건으로서의 미투 운동은 침묵 되어온 과거의 폭력에 대한 단죄 가능성을 열어줌으로써 피해자들에게 각성의 계기가 되었고, ‘남성’이란 이름에 ‘잠재적 가해자’라는 꼬리표를 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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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도시와 떨어진 시골 마을에서 입시에 몰두하던 재훈은 각종 언론사와 방송사를 통해 소용돌이치던, 젠더 문제에 관한 뉴스들을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여겼다. 하지만 입시가 끝난 후 들어가게 된 대학 커뮤니티는 이미 그 폭풍의 거대한 여파 아래 있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남학생들 곁에서만 지냈던 재훈에게 대학에서 만나게 된 수많은 여학생은 다소 낯설고, 친구가 된 이후에도 위화감을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그 위화감의 원인 중 하나가 자신에게 주어진 ‘남성’이란 정체성을 함께 이루는 이들이 만들어온, 폭력의 역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처음으로 좋아하게 된 시인이 자신의 학생에게 ‘나랑 자서 네 시가 좋아진다면 나랑 잘래?’라는 말을 했다거나, 비평가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감독이 작품 제작을 구실로 주·조연 배우를 수차례 성폭행했다는 소식은 우연으로 치부하기 어려울 만큼 적잖게 들려왔다. 혼란스러웠던 재훈은 자신이 유독 재수가 없는 편이라며 이 숱한 사건들을 못 본 채 넘겨 보려고도 했다. 자신이 고등학교에서 보냈던 외로운 시기에 위로와 희망이 되어주었던, 친구이자 참다운 선생님이 되어주었던 (남성) 예술가들을 스스로부터 끊어내는 일은, 자기 부정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변의 남학생들이 여학생들에게 손절당한 이야기라던가, 가까운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 드러나는 자신의 찌질한 모습에 계속해서 노출되다 보니, 남성이란 성별을 만병의 근원이자 혐오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기가 더 어렵다고 여기게 되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 자신이 권력자의 위치에 이르는 시점이 왔을 때, 앞서 언급했던 성폭력 가해자들과 다를 바 없는 사람이 되리라는 두려움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정체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한 재훈은 자신이 겪는 이 부조리가 어디서부터 온 것인지 조사하기 시작한다. 이 방법이 거짓 영웅으로 탄로 난 예술가들에게 자신을 의탁하는 길 외에 유일한 선택지였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는 미투 운동의 연원이자 자신의 우상들을 상징적으로 살해했던 페미니즘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공부하게 되며, 자신이 겪었던 개인적인 어려움들이 사실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차별과 착취의 구조 안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12 이 깨달음을 계기로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남성’이란 정체성과 그것이 담지하는 폭력의 역사로부터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 재훈
정체성을 이루는 삶의 조건을 감당할 수 없어 자발적 실종을 감행하는 사람들, 자신의 이름을 지우고 야반도주하는 사람들의 포스트 라이프는 세 갈래 길로 나뉜다. 익명으로 살아가거나, 새로운 이름을 지어 갖거나, 다른 사람의 이름을 훔치거나. 재훈의 목표는 남성 정체성으로부터의 이탈을 통한 존재론적 이민이었고, 그는 이를 위해 스스로 계속해서 외면하고자 했던 포르노와 성폭력의 근원지인 섹슈얼리티에 발을 들인다.
그 도망의 궤적에서 만들어진 몇 가지 연작 중 <오래된 미인의 얼굴>은 재훈이 2023년에 촬영한 셀프 포트레이트다. <Premiere> 속 Fern처럼 인물의 이목구비가 높은 해상도로 재현된 것과 반대로, 역광으로 촬영된 위 사진 속 인물의 초상은 짙은 그림자로 채워져 있다. 나무와 잎으로 우거진 숲속에 서 있는 그녀는 긴 생머리와 다소곳한 자세의 실루엣, 얇고 하얀 천 소재의 상의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아름다운 위 사진의 내용은, 재훈이 남성으로서의 죄책감과 성별 불쾌감에 시달리다 익명의 여인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유토피아적 결말로 쉽게 해석될 수 있다. 하지만 안초롱이 지적했듯이, 변신 대상을 10대나 20대 언저리의 젊은 소녀로 설정했다는 점이 이 이야기를 단순한 환상 동화로만 보기 어렵게 만드는, 미스터리한 기시감을 일으킨다.13 주아명은 글 「Rest」에서 이러한 기시감의 정체를 추리하며, <오래된 미인의 얼굴> 속 재훈의 외부적 모델이 성인용 인형Sex Doll14이었다는 점을 특기한다. 실제로 사진에 하얗게 비치는 상의는 성인용 리얼돌의 구성품인 란제리다. 촬영이 이뤄진 숲에 도착하기 전 그는 여관방에서 자신의 옷과 인형의 옷을 바꿔 입혀 주었다. 마치 본인이 인형의 역할을 대신하겠다는 듯이 말이다.15
역사적으로 ‘여성’은 타자의 대명사였고, 성노동자는 가부장제의 구멍을 메우기 위해 마련된 직업이었으며, 성인용 인형은 이의 현대적 대용품이다. 이 모든 역할이 남성 주체가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는 과정에서 필요했던 제물이자 노예 그리고 상품이었다고 이해한다면, 재훈은 <오래된 미인의 얼굴> 속에서 자신의 혐의에 대한 증거물로서 현현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외면하고자 했던 남성의 죄에 대한 대속代贖일까, 혹은 잠재되었던 비규범적 성적 판타지16의 발현일까.
위 질문에 대한 답을 하기 위해, 다시 한번 사진을 들여다본다. <오래된 미인의 얼굴>은 직사각형 프레임의 세로 사진으로, 그 프레임 안에는 수많은 식물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만약 그 배경을 이루는 나뭇잎 한 장 한 장이 남자 한 명에 대한 은유라면, 사진 속 재훈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수많은 남자로부터 쫓기는 여자 역할을 자처하는 셈이다. 그렇다면 저 흑백 수렁은, 자신의 죄를 페티시로 수선해 입음으로써 해결하고 싶었던 한 사람의 마음이 생성해 낸 자유의 공간이다.
[1] Raymond Sokolov, “Critique: Censoring Virginia”, The Wall Street Journal, 6 February 1991, p. A10.
[2] Richard B. Woodward, “The Disturbing Photography of Sally Mann”, The New York Times, September 27, 1992, Section 6, Page 29. https://www.nytimes.com/1992/09/27/magazine/the-disturbing-photography-of-sally-mann.html?smid=url-share
[3] Blood Ties: The Life and Work of Sally Mann, Steven Cantor & Peter Spirer, Moving Target Productions, 4 March 1994.
[4] ‘Idiosyncrasy’를 필자가 맥락에 대한 판단 하에 ‘특이한 사랑 방식’으로 번역함. 사전에서는 ‘(개인의) 특질, 특징, 개성, (그 사람) 특유의 표현법’ 등으로 번역됨.
[5] Steven Cantor & Peter Spirer, 같은 작품.
[6] Fern이 <Premiere>와 함께 인스타그램에 게시한 글을 필자가 일부 번역했다. https://www.instagram.com/p/DCmloApvUBh/?utm_source=ig_web_copy_link.
[7] Devan Díaz, “Fern and the city”, Dirt, 30 Nov 2023, https://dirt.fyi/article/2023/11/fern-and-the-city.
[8] <Audition>과 함께 게시된 글. https://www.instagram.com/p/DCPcdatvHHc/?utm_source=ig_web_copy_link.
[9] Fern Cerezo의 홈페이지에 적힌 본인의 셀프 포트레이트에 관한 설명 일부, https://www.ferncerezo.com/about.
[10] 서지현이 해당 게시글에서 인용한 알베르 카뮈의 말을 재인용, 황춘화, "[전문] 서지현 검사가 올린 안태근 성추행 폭로 글", 2018년 1월 30일,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830046.html#ace04ou
[11] 정희진, 「여성에 대한 폭력과 미투 운동」, 『미투의 정치학』 p.87, 교양인, 2019년
[12] 안담, 「만 명의 여자」, 『친구의 표정』 p.191, 위즈덤하우스, 2024년
[13] 안초롱·재훈, “《오래된 방은 궁전》 리뷰 w.안초롱”, 하루에하나, 2025년, https://oneactiononeday.com/subpage/inthecastle_question.html
[14] 섹스돌Sex Doll은 성적 파트너의 크기와 형태를 갖춘 인형으로 성인 용품의 일종이다. ‘러브돌’이나 ‘리얼돌’과 같은 이름으로도 통용되며 성적 파트너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한다. 성적 자극을 위한 신체 부위와 몸통과 같은 신체 부위로 구성될 수 있다. 다양한 종류의 옷을 입혀주고, 가발을 바꾸거나 화장을 고치고, 심지어 전기담요나 목욕을 이용해 온도를 체온과 비슷하게 맞추는 등의 특정한 준비과정을 곁들일 수 있다. 출처: 위키 백과, 나무 위키
[15] 주아명, 「Rest」, 『오래된 방은 궁전』, Tank Press, 2025년 출간 예정.
[16] 한솔은 재훈의 사진 연작들을 작가의 강간 판타지가 섞인 결과물로써 이해한다고 말한 바 있다. 유승아·재훈·한솔·황예지, 「《오래된 방은 궁전》 리뷰」, 『오래된 방은 궁전』, Tank Press, 2025년 출간 예정.
작가 소개
재훈
공동체의 문화적 풍경에 스스로를 투영하는 셀프 포트레이트를 찍어왔다. 페미니즘 이후의 남성 섹슈얼리티를 사진과 설치 등의 언어로 풀어내는 일을 하고, 그 과정 중 《모텔전: 눈 뜨고 꾸는 꿈》 (2023, 미성장 모텔, 서울)에 참여했으며 개인전 《오래된 방은 궁전》 (2024, 이안 두드림, 용인)을 열었다. 예술은 대화의 매체라는 생각으로 전시 리뷰 프로젝트 '하루에 하나'를 운영한다.
창고

Joan Jonas (1936-)
Joan Jonas는 미국의 시각 예술가이자 비디오 및 퍼포먼스 아트의 개척자이다. 문학과 조각을 공부한 시간과 영화에 대한 애정을 모아 만들어 선보인 작품을, 사람들은 ‘퍼포먼스’라는 이름으로 불러주었다. 그렇게 시기상 퍼포먼스 아트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들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녀의 대표작 중 하나인 <Mirror Piece>는 거울을 든 퍼포머들이 움직여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통해 퍼포머와 관객, 그들이 놓인 공간을 보여주는 퍼포먼스 작품이다. 그녀의 동료인 Susan Rothenberg는 Joan의 작업이, 참여자들의 지각 체계를 바꾸는 데 그 목표가 있다고 보았다.
유년기부터 지금까지, 그녀는 개를 좋아하고, 기르며, 그리고, 퍼포먼스와 영상에 출연시켜 왔다.

Gloria Steinem (1934-)
Gloria Steinem(왼)은 미국에서 나고 자란 페미니스트이다. 집 대신 차에서 생활하고 거리에서 골동품을 되팔며 생계를 유지하던 아버지와 그를 대신해 모든 걱정을 떠안으며 산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로 활동했다. 플레이보이 클럽에서 바니걸로 위장 취업하며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이 겪는 불합리한 노동 조건과 성차별적인 대우를 폭로하는 기사 "A Bunny's Tale"을 쓰며 이름을 알렸다. 여성의 관점과 이슈를 다루는 선구적인 페미니스트 잡지 《Ms.》를 공동 창간했으며, 《Ms.》는 제2세대 페미니즘 운동의 중요한 플랫폼이 되었다.

Yukiyo Kawakami (생몰生沒 미상)
Yukiyo Kawakami(왼)는 일본 사진작가 Masahisa Fukase의 첫 번째 부인이다. 또한 Fukase의 초기 사진 작품의 주제이며 피사체였다. 그들은 8년 동안 함께 살았고 두 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첫 번째 아이는 사산되었다. Fukase는 사산된 아이를 사진으로 찍어 1961년에 열린 자신의 첫 개인전 《Kill the Pig》에 전시했다.
1962년, Kawakami는 그들의 두 번째 아이를 데리고 Fukase를 떠나 실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