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를 부탁해요.
저는 민주고요. 한국에서 태어났고, 지금은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예요.
제가 처음 궁금했던 건, 어쩌다가 사진을 접하게 됐는지, ‘이걸 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된 계기예요.
아마 만 18살, 19살 때였던 것 같아요. 인스타그램을 하다가 어떤 분이 제 사진을 찍어보고 싶다고 하셔서, 그땐 어리니까 ‘재미있겠다’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그분이 필름 카메라를 쓰셨거든요. 그런데 필름 카메라를 들고 있는 모습이 너무 멋있어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나도 필름 카메라 한 번 사볼까?’ 했던 것 같아요. 그때는 멋있고 싶잖아요.
지금도 멋있고 싶지만, 그때는 정말 멋있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필름 카메라를 사서 사진 찍어보고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그러다 보니까 사진 하는 친구들이 생기고, 그렇게 시작하게 된 것 같아요. 처음엔 진짜 취미였고, 그러다가 ‘사진을 좀 제대로 배워볼까?’ 해서 계원에 가게 됐고, 그 이후로 좀 진지하게 생각하게 됐어요.
계원예대 입학 시즌이긴 하더라고요. 프린트숍 갔는데, 계원예대 준비하는 학생들이 긴장한 채로 출력하고 있더라고요. 입시 때 포트폴리오는 어떤 식이었는지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어요?
그때 포트폴리오를 저는 제 첫 작업으로 쳐요. 대학교 입학하기 전에 일본에 1년 동안 워킹홀리데이를 갔는데, 그때 사진을 진짜 많이 찍었어요. 그냥 카메라를 들고 다니면서 길거리를 계속 찍었어요. 그러다가 ‘나도 다른 작가들처럼 작업이라는 걸 한 번 해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친구 중에 일본의 키사텐이라고 하는 전통 찻집, 커피숍에서 일하는 친구가 있었거든요. 거기 유니폼이 메이드복 같은 느낌인데, 그 친구를 알게 돼서 “내 모델 한 번 해주지 않겠냐” 부탁을 했고, 그때 처음 시작했던 작업이 〈Holiday〉라는 작업이에요. 제 웹사이트 제일 아래쪽에 있어요. 첫 작업이라서요.
그때 일본에 있으면서 집에서 쉬는 날이 하루도 없었어요. 365일 매일 밖에 나가고, 매일 일하고, 그 1년이라는 시간이 너무 아까운 거예요. ‘이게 1년밖에 없으니까 뭐라도 계속 해야 될 것 같다’라는 압박감이 있었어요. 사람들이 집에만 있으면 자기가 아무것도 안 하는 것 같아서 소외감을 느끼는 것처럼, 저도 그게 되게 심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맨날 나가서 놀고, 일하고, 사람 만나고 하다가 몸이 엄청 아픈 날이 한 번 있었어요. 그때 ‘이렇게 열심히 살다가 아프면 아무 소용이 없는 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노는 게 더 이상 노는 게 아닌 거죠. 압박감 때문에 나가고, 압박감 때문에 사람을 만나고, 사귀고. 그러면 내가 정말 쉴 수 있는 시간은 언제일까, 그 질문에서 시작된 작업이 〈Holiday〉였어요. 그게 계원 입시 포트폴리오였고요.


지금 그 사진이 갖는 의미와, 당시의 의미가 좀 달랐을 것 같거든요. 여자가 여자 친구를 찍으면 생기는 어떤 오해들, 얄팍하게 소비되는 시선 같은 게 있잖아요. 그런 시선 안에서도, 기분 좋았던 피드백이나 다음 작업으로 가게 해 준 동력 같은 게 있었을까요?
사실 그 작업에서 파생된 생각이나, 다른 작업으로 이어지는 경로 같은 건 거의 없는 것 같아요. 그 작업은 정말 그 작업으로 끝났고요. 그리고 여자가 여자를 찍으면서 나오는 다른 시선에 대해서는, 사실 지금 처음 듣는 얘기예요. 그래서 되게 신기해요.
그때 저는 그걸 ‘작업’이라고 부르면서도 자신이 없었어요. 이걸 어떻게 보여줘야 할지, 이게 과연 작업인지, 그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그 이후에 대해서는 사실 크게 생각해본 적이 없어요. 그래도 처음으로 작업을 하면서 ‘이야기’를 넣어봤다는 데 의미를 두고 싶어요. 그 정도?


저는 민주 작업이 어느 정도 쌓인 상태에서 초기 사진들을 다시 보니까, 최근에 선풍기에 티셔츠를 씌워 놓은 이미지 같은 것들이 있잖아요. 그런 이미지들의 원석 같은 느낌이 들더라고요. 초기작을 재발견하는 일이 어렵긴 한데, 어떤 서정성이라든지 타인을 바라보는 시선 같은 게 민주만의 특수한 무언가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좀 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어쨌든 이 작업들이 있고 그러다가 아버지가 ‘휙’ 하고 튀어나오잖아요. 그 사이 구간에는 어떤 일들이 있었어요?
그 사이에는 이야기를 직접 넣는 작업은 없었고요. 저는 카메라를 잘 들고 다니는 편이었어요. 거의 매일같이 찍었고, 그래서 아카이브가 엄청 많이 쌓였어요. 컴퓨터 안에요. 그런데 그걸 한 번도 제대로 들여다본 적이 없더라고요. 찍기만 하고. 그래서 “이번에는 이 아카이브들 안에서 내가 이야기를 새로 만들어보자”라고 생각했고, 그때 나온 작업이 〈Still, Life〉예요. 그 작업은, 제가 이미 찍어놓은 사진들 안에서 이야기를 찾아보려는 첫 시도였어요.
그전에는 이야기를 먼저 가지고 사진을 찍었다면, 이번에는 ‘내가 이미 찍어놓은 것들 안에 분명 내가 사진을 찍었던 이유가 있을 텐데, 길 가다 찍었다고 해도 이유는 있겠지, 그 이유를 한 번 찾아보자’는 질문에서 출발했어요. 그때 계속 떠올랐던 말이, 뭐랄까… 지극히 사적인 이야기이고 상대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몰라서 인터뷰 때는 얼버무렸는데, 〈Still, Life〉는 어린 나이에 원치 않았던 (계획에 없던) 임신을 하고 낙태를 해야했던 친구에게 주는 작업이었어요. 그 당시 친구의 상실과 죄책감을 옆에서 같이 마주할 자신은 없었던 소심했던 저에 대한 속죄를 사진으로나마 풀려고 했어요. 그 친구는 아직도 모른답니다. 후후.. 어자피 아주 오래된 이야기라 이참에 알게 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어서 메모에 적어요. 영어를 잘 못했던 때에 'Still life'라는 단어가 '아직도 인생'으로 읽혔던 기억을 가져와서 제목에 차용했습니다. 제 작업을 찾는 과정이기도 했어요. 그게 중간 작업이고, 그 다음에 바로 아빠 작업이 나온 거예요.

충청남도 홍성에서 태어난 김연인은 대학생 때 민주화운동을 하다 구속되어, 재학 중이던 대학에서 제적당한다.
그 이후로 ‘힘’이라는 출판사를 내어, 계속해서 운동권에서 활동한다.
1983년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
1989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1990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0월,
1994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그리고 2003년,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서류가 그의 집으로 날아온다.
2019년, 그의 아들은 경찰이 되고, 미묘하게 혼란스러운 상황이 벌어진다.
‘이몽(異夢)’이라고 읽는 이 이야기는 작가의 집으로 민주화운동 유공자 인정 서류가 날아왔던 여덟 살의 그날부터,
엄마에게 “민주가 뭐야?” 하고 물었던 날부터, 서류에 ‘보상금’이라는 이름으로 찍혀 있던 ‘0’ 일곱 개를 본 그날부터 시작된다.
어떤 집단의 권력이 개인에게 순기능으로 작동하지 않았다는,
그런 판타지 속에 살아왔던 사람에 대하여.
이야기를 읽어내는 방법을 찾지 못해, 꿈만 같은 세상을 허우적대는 그의 딸이.
또, 그의 아들이.

아버지 작업은 저한테 덜컥 걸리는, 되게 깊은 울림이 있는 작업이었거든요. 내용 면에서도 그렇고, 사진 자체에서도 울림이 컸던 것 같아요. 이전의 〈Still, Life〉나 〈Holiday〉에서의 톤은, 민주가 완전히 주도권을 쥐고 있다기보다는 시간의 흐름 안에서 자연스럽게 찍힌 사진 같았는데, 아버지를 찍을 때는 뭔가 단단히 붙잡아 두는 느낌, 정말 제대로 보고 싶어 하는 힘 같은 게 느껴졌어요. 이 작업의 제작 비하인드를 조금 듣고 싶었어요.
그때는 저 자신한테 되게 엄격했어요. 〈이몽〉 작업 때는 정말 엄격했고, 말씀하신 것처럼 잘 ‘잡아놓고’ 싶었어요. 어쨌든 졸업 작품이기도 했고, 아빠라는 소재를 언젠가는 써보고 싶었거든요. ‘쓴다’는 말이 좀 이상하긴 한데, 아빠라는 소재를 언젠가는 사용해 보고 싶었는데, 이걸 한 번 쓰면 더 이상은 못 쓸 것 같은 거예요. 그래서 한 번 쓸 때 정말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어요. 처음 시작하게 된 계기는, 〈이몽〉 작업 안에 나오는 군인 군화를 아빠 책으로 감싸는 장면에서였어요.
그 군화가 저희 오빠 군화인데, 남자들은 군대를 가니까 집에 군복이 하나씩 있잖아요. 어느 날 집 장롱인가 어디를 열었는데 군화가 보이는 거예요. 그 순간, 예전에 아빠 친구분이 장난치듯이 제 오빠에게 “너희 아빠가 군인한테 얼마나 맞고 다녔는데, 네가 경찰이 되냐”라고 했던 말을 들은 기억이 같이 스쳤어요. 생각해 보니까 아빠 입장에서는 집 안에 군화나 경찰복이 있다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다, 그런 걸 보고 같이 산다는 게 되게 이상할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시작됐어요.
아빠라는 소재를 사용하긴 했지만, 제가 어릴 때부터 가지고 있던 트라우마 같은 게 있었어요. 저는 ‘이상하다’라는 말을 진짜 많이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예술하는 사람들이 다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어느 순간 그게 너무 스트레스였어요. 내가 왜 남들하고 다른 선택을 하고, 다르게 살아가고, 다른 생각을 하는지. 왜 나는 남들이랑 똑같지가 않을까. 그게 엄청 스트레스였고, 사람들이 ‘왜 나를 이상하게 볼까’도 스트레스였어요. 그래서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진짜 이상한 건 이런 거다’라는 걸 은연중에 보여주고 싶었던 것 같아요. 제가 생각하는 ‘이상한 것’은, 민주화 운동을 했던 남자의 집에 아들이 경찰이 됐고, 그 경찰의 군화와 경찰복이 집 안에 있고, 예전에 경찰한테 맞고 살았던 남자가 그걸 보면서 같이 살아간다는 상황이에요. 그게 진짜 이상하고, 진짜 판타지 같다고 생각했어요. 거기서 출발했어요. 다행히 아빠가 되게 협조적이었고, 그게 큰 동력이 됐죠.싶었어요.
그리고 저희 엄마, 아빠 둘 다 운동권에 계셨는데, 그래서인지 제가 살면서 집단 안에 있을 때 부딪히는 일들이 굉장히 많았어요. 그럴 때마다 부모님이 저를 지지해 주셨고, 그런 일이 자주 있다 보니까 이 이야기를 하는 건 그냥 내 일이다, 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무엇보다 아빠가 운동권에서 나온 지 꽤 오래됐는데, 그 이후로 아빠의 기를 좀 올려주고 싶다는 생각도 딸로서 솔직히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내가 젊을 땐 여기 있었고, 저기 있었고, 친구들이랑 뭘 했고, 어디 나가서 최루탄 맞았고, 누구한테 맞았고, 어디 끌려갔다” 이런 이야기를 계속 들으면서 자랐거든요. 그런 이야기들이 제 머릿속에 겹겹이 쌓여 있어서, 작업하면서 그걸 소설처럼 풀어보고 싶었어요.
왜냐하면 이건 제 일이 아니고, 물론 우리 아빠 이야기지만 제가 직접 경험한 일이 아니잖아요. 역사적으로 너무 큰 사건이기도 하고, 아빠뿐만 아니라 그때 고통을 받은 사람들이 너무 많고. 그런데 제가 이걸 다큐멘터리처럼 “이런 일이 있었어요, 저런 일이 있었어요”라고 나열하는 건, 제3자로서 너무 예의가 없는 것 같은 거예요. 그렇게 풀고 싶지 않았어요. 남의 이야기를. 그래서 내가 할 수 있는 방식이 뭐가 있을까 고민하다가, 아빠의 이야기를 토대로 내 이야기를 새로 써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 작업을 판타지 소설 쓰듯이 풀었어요. 아빠가 내 이야기의 주인공이고, 사실을 기반으로 하지만 제 이야기가 덧대어져 있고. 비난 같은 것들을 피하려고 했던 것도 사실이에요. 이 큰 이야기를 건드린다는 게 걱정되기도 했고, 아빠한테 들은 이야기를 제가 따로 팩트 체크해본 적도 없으니까.
그리고 이걸 너무 슬프게만 풀고 싶지도 않았어요. 아빠가 지금 슬프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니고, 잘 살고 있거든요. 제가 보기엔 이 스토리의 승자는 아빠였어요. 그래서 그걸 가치 있게 풀고 싶었어요. 너무 슬프게만 바라보지 않았으면 좋겠고, 그래서 그렇게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는 것 같아요.



어쨌든 본인의 이름도 ‘민주’고, 운동을 한다는 건 다 가치투쟁이잖아요. 아버지가 주요하게 했던 말이나, ‘아버지는 왜 그런 일을 했을까’를 역으로 물어봤을 때, 민주가 느끼기에 어떤 가치 때문이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가치투쟁이었는데, 가치가 달랐던 것 같아요. 아빠가 생각했을 때 이쪽이 더 가치 있는 일이고, 내 가치는 여기에 있다, 라고 느꼈던 반면, 당시 사회는 그쪽에 가치를 두지 않았던 거죠. 정말 생각하는 가치 자체가 달랐던 것 같아요. 엄마, 아빠는 운동권이었지만,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는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굉장히 반대하시던 분들이었어요. 그분들이 생각했을 때 가치는 ‘네가 대학교에 다니는 것, 졸업하는 것, 남들 신경 쓰지 말고 밥 벌어 먹고 사는 것, 자식 키우는 것’이었으니까요. 그냥 가치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서로가 서로를 이상하게 생각하게 되고, 앞서 말한 이상한 것과 연관이 생기는 것 같고. 아빠 젊었을 때는, 본인이 하는 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 같아요. 친구들도 다 그렇게 하고, 자기도 그렇게 하고, “이게 나한테 가치 있는 일이니까”가 전부였겠죠?
아버지가 입버릇처럼 하시던 말이나, 민주에게 일종의 염원처럼 남아 있는 말이 있을까요?
저한테 어떻게 살아라 하고 구체적으로 말하신 적은 없어요. 엄마, 아빠 둘 다. 대신 항상 했던 말은 ‘주체적으로 살아야 한다’, ‘독립적인 여성이 돼야 한다’ 였어요. 어린 저한테 약간 세뇌하듯이, 종교 가르치듯이 계속 말씀하셨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그 말에 갇혀 사는 것 같아요. ‘나는 주체적으로 살아야 하고, 독립적인 여성이 되어야 한다.’
좋은 말이고 좋은 조언인데도, 한편으론 족쇄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의사가 되어야 한다" 처럼 목표가 정확한 것도 아니잖아요. 어느정도가 충분히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건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두 분에게는 그게 염원이었을 것 같아요. 둘 다 자유롭지 않은 시대에 살았고, 자유로워지려고 싸워야 했고, 또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여성이 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았을 테니까요.
신기한 게, 어쨌든 출판사까지 내시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세 번인가, 네 번인가…
네 번인가, 네 번인 것 같아요.
그 정도로 뭔가 하셨던 분이잖아요. 시대상이 그랬다고 해도, 아버지가 되게 투철한 분이셨던 것 같거든요. 지금은 그 기억들을 어떻게 소화하고 계신 것 같아요? 흐릿하게 지나간 일처럼 보는지, 여전히 또렷하게 붙잡고 계신지 궁금했어요.
요즘에는 그 당시 이야기를 잘 안 하셔서,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가끔 술 마실 때나, 제가 어릴 때 아빠 친구들 술자리에 따라갔을 때, “야, 너네 아빠가 뭐 했는지 아냐” 이런 식으로 친구들이 먼저 얘기를 꺼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아빠는 오히려 말을 아끼는 편이었어요. 제가 “얘기해 달라”고 해도 잘 안 하시고요. 왜 그런지는 저도 정확히 모르겠는데, 아마 그게 ‘대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요. ‘남들 다 했고, 나만 한 것도 아니다’ 정도로 생각하시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요. 대부분은 자기 이야기를 영웅설화처럼 풀고 싶어 하는데, 아버지는 오히려 그런 정보들을 밖으로 많이 이야기하지 않으셨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더, 민주가 소설처럼 쓰고 싶었던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고요. 민주가 느끼기에, 그런 경험을 한 아버지와 함께 산다는 건 어떤 감각이에요?
아무래도 부모님이 운동권에 계셨고, 그 밑에서 자라서 그런지, 저는 항상 싸움판에 서 있는 느낌이 많았어요. 학교 다닐 때도 그랬고요. 저는 고등학교를 그만뒀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학교를 잘 안 나가기도 했고, 집단 안에서 ‘안 맞는 것들’이 항상 많았어요. 지금 와서 생각하면, 결국 가치 추구가 달랐던 것 같아요. 그때 가장 크게 부딪쳤던 이슈가 염색, 파마 같은 거였어요. 저는 공부도 열심히 하는 학생이었는데, 선생님 입장에서는 교칙에 어긋나니까 계속 벌점을 주는 거죠. 그때 보통 부모님이면 “머리 풀어라, 그만 싸워라”라고 말할 텐데, 저희 아빠는 선생님들한테 이게 뭐가 문제냐, 교칙이 잘못된 거 아니냐, 그게 공부하는 데랑 무슨 상관이냐고 말해 주셨어요. 그 길잡이를 되게 잘해 주신 거예요.
그 덕분에 제가 기죽지 않고, 내 머리와 내가 공부하는 것 사이에는 아무 연관이 없다는 기준을 스스로 잡을 수 있었어요. 어릴 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정말 큰 버팀목이었던 것 같아요. 그때 부모님이 버팀목 역할을 못 해주고 네가 틀렸다고 했다면, 저는 제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것 같거든요. 그런 부분에서 부모님이 잘해 주신 것 같아서 되게 다행이고, 또 사실 운동권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게 어떤 건지 다른 샘플이 없어서요. 내가 사는 방식이 일반적인 건지, 특이한 건지 잘 모르겠어요. 그리고 〈이몽〉 작업을 소설처럼 쓰고 싶었던 이유 중 하나도, 제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에요. 엄마, 아빠가 운동권에 있었고, 그들의 자식이긴 한데, 그렇다고 운동권 역사에 대해서 남들보다 세세하게 잘 아는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관심이 큰 것도 아니거든요.
그래서 “이걸 내가 역사 서술처럼 가져가기는 어렵겠다. 차라리 소설로 가져가야 한다”라는 판단이 있었어요.
그리고 지금도 우리가 ‘운동’ 안에 있어야 할 때가 많잖아요. 한국 사회도 그렇고, 특히 네덜란드에 갔을 때 아시아 여성으로서 곤란함을 겪을 때도 있을 것 같고요. 민주에게 요즘 중요한 가치,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았다고 느끼는 부분, 또 본인이 어떤 운동 안에 있다고 느끼는지도 궁금해요.
지금은 네덜란드에 살고 있고, 예전엔 일본에도 있었지만, 어디를 가나 구조는 비슷한 것 같아요. 소외되는 사람이 있고, 외면받는 사람이 있고, 그 안에서 특권층이 있고. 말씀하신 것처럼 아시아 여성이라서 제가 겪는 일도 많지만, 반대로 아시아 중에서도 ‘한국인’이기 때문에 갖고 있는 것들도 많고. 그 사이에서 밸런스를 찾으려고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
내가 갖고 있는 특권을 인지하는 동시에, 내가 특권층에 들지 않았을 때 겪게 되는 수모들에 대해서도 스스로 계속 고민해요. 이게 굉장히 헷갈릴 때가 많거든요. 한국은 아시아 안에서는 잘사는 나라지만, 유럽에 오면 아시아인은 그냥 ‘아시안’일 뿐이고. 그런 지점에서 되게 헷갈릴 때가 있어요. 또 내가 아시아에서, 한국에서 겪는 일들과, 정말 더 작은 나라에서 온 친구들이 겪는 수모는 엄연히 다르잖아요. 그런 지점에서 밸런스를 찾는 게 지금 숙제인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느끼기에는, 한국 안에서 제국주의나 식민을 생각하는 방식과, 네덜란드에서 그걸 생각하는 방식이 다를 수밖에 없고, 다른 인종·다른 국가 친구들이랑 섞여서 사진을 하다 보면, 민주 안에서 뒤집히는 지점도 많을 것 같아요.
한국에 있을 땐 몰랐는데, 제가 한국 이야기를 되게 많이 한다는 걸 알게 됐어요. ‘내가 한국인이라서 그런가?’라고 생각해보면, 또 다른 한국인 친구들은 그렇지도 않거든요. 이상하게 저는 한국 이야기에 집착이 심해요. 그래서 사실은 한국 이야기에서 좀 빠져나가고 싶은데, 어떻게 빠져나갈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한국 이야기를 다른 스펙트럼으로 넓혀갈 수 있는 다리, 징검다리를 작업 안에 만드는 것 아닐까. 서로의 공통점이 생길 수 있게 하는 것. 지금은 딱 그 시기에 있는 것 같아요. 그런데 그게 쉽지가 않아요. 아까 말했던 특권층과 소외받는 사람 사이의 중간을 찾는 일이 쉽지 않은 것처럼요. 지금은 작업을 ‘세대’의 이야기로 확장해야 한다고 느끼고 있어요. 최근에 한 작업도 결국 한국 이야기이긴 한데, 그걸 어떻게든 이 사회와 잘 어우러지게 설명해 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그래도 여전히 그 ‘중간’을 찾는 게 어려운 것 같아요.


이 작업 〈이몽〉을 다른 친구들이 보고 해 준 말들도 궁금했어요. 저는 한국인이어서 접속이 더 빠른 편인 것 같은데, 외국에서 크리틱 시간에 민주 작업을 봤을 때, 어떤 코멘트들이 나왔는지도 궁금해요.
한국 분들이 봤을 때는 좀 치밀하게 보는 면이 있는 것 같아요. 아무래도 좀 경건한 마음으로 보게 되고. 근데 외국 친구들이 봤을 때는, 자기들이 모르는 역사라서 거기서 오는 흥미로 보는 것 같아요. ‘측은하다’, ‘슬프다’, ‘아버지가 고생하셨겠다’ 이런 감정보다, “운동권이었어? 민주화 운동을 했어? 독재 정권이었어?” 이런 키워드에 끌려가는 느낌이랄까요.
그래도 제가 느끼기엔, 이미지에서 받는 임팩트 자체는 국가와 상관없이 비슷한 것 같아요. 이미지가 가진 힘에 있어서는 어디서 보든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한국은 배경을 알고 있으니까 다른 감정들이 추가로 불러일으켜질 수 있지만, 이미지가 주는 1차적인 힘은 비슷하다는 느낌이 있어요.
저는 제일 임팩트 있었던 게 욕조 사진이랑, 그 뒤에 아버지 뒷모습이 나오는 사진이었어요. 딸이 해 주는 정화 같은 건지, 그늘을 읽어내는 태도인지 정확히는 모르겠는데, 되게 강하게 남더라고요. 민주가 생각했을 때도 임팩트 있는 사진이 따로 있는지, 그리고 욕조를 사용한 이유도 궁금했어요. 저는 욕조가 계속 마음에 남더라고요.
아빠가 욕조 안에 있는 사진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 사진이랑, 욕조를 세워놓고 여권 면을 붙여놓은 사진도요.
맞아요. 두 장이 있어요.
그 두 장이 연달아 있는 구성이 저는 좋았어요.
처음 들어봐요. 좋다. 반신욕하는 사진은, 아빠의 취미가 반신욕이었어요. 항상 하던. 그래서 그 모습을 찍었고요. 그 사진에서는 아빠 귀를 포토샵으로 지웠거든요. 아빠가 귀 한쪽이 거의 안 들려요. 그 사실과 직접적인 연관이 있는 건 아니었는데, 작업하다가 문득 ‘아빠 귀를 한 번 지워볼까?’ 했는데, 생각보다 잘 지워지는 거예요. 그 뒷모습을 찍을 때 들었던 생각이, 아빠가 엄마랑 결혼할 때 엄마 집안 반대가 되게 심했거든요. 감옥 다니고, 잡혀가고, 돈도 잘 못 벌고, 힘든 일이 많았으니까요. 그 과정에서 평생 들을 수 있는 안 좋은 말들을 이미 다 들었다고 이야기하신 적이 있었어요. 운동권에 있으면서 얼마나 많은 소리를 들었겠어요. 그래서 귀를 지움으로써 “이제는 그런 말들을 더 이상 안 들었으면 좋겠다”라는, 제 사적인 감정을 처음으로 넣어본 사진이었어요.
욕조를 세워놓은 사진은, 아빠 여권 면들을 하나하나 뜯어서 붙인 거예요. 아빠가 운동 유공자가 되기 전까지는, 여권에 빨간 줄이 그어져 있어서 해외를 못 나갔어요. 출국 결격 사유가 되는 거죠. 그래서 아빠가 해외에 가고 싶어도, 일을 하러 가고 싶어도 못 갔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 빨간 줄이 지워지고 나서야 해외여행을 엄청 많이 다니셨거든요. 본인한테 한이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스탬프 찍힌 면들을 다 모아서 욕조에 붙였어요. 욕조라는 오브제는, 어디서 봤는지 기억은 안 나는데, 내 눈물로 이 욕조를 다 채우면 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라는 느낌의 노래 가사에서 빌려온 이미지였어요. 마침 집 베란다에 욕조도 있었고, 한 번 이 스탬프로 욕조를 채워볼까? 해서 시작했는데, 당연히 욕조는 안 채워지죠. 아무리 스탬프가 많아도. 그 지점에서 오는 이야기가 있을 것 같아서 같이 찍게 됐어요.
만약 이게 소설이라면, 아빠라는 주인공은 어떤 감정 안에 있는 사람 같아요?
행복해 보이진 않아요. 혼자 자기 위안을 계속 하는 사람 같아요. “그래도 나는 잘 살았고, 좋은 일을 했고,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했다”라고 스스로 정리하지만, 소설의 말로만 놓고 보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아요.
그래서인지 감정선이 오래 남는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아버지는 이 작업을 보고 뭐라고 하셨어요? 졸업 작품 보러 오셨다든가, 자기 사진을 보고 특별히 한 말이 있었는지.
사진에 대한 감상은 거의 안 했어요. 졸업 작품 보러 오시긴 했고, 제 작업이 어디 실리거나 하면 그걸 캡처해서 페이스북에 올리고, 친구들한테 자랑하고, 그런 건 되게 적극적으로 하세요. 근데 작업 자체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좋아하나 보다” 이 정도? 직접적인 평은 없었어요.
그런 부분에선 말수가 적으신 편이네요.
쑥스러운 것 같아요. 본인이 나왔으니까.
쑥스러운 운동권. 되게 재밌고, 한편으론 신성하기도 하고요. 저한테는 되게 기억에 남는 작업이었어요. 근데 어쨌든 한국에서 계엄이 터졌잖아요. 저는 그래서 이 작업의 소중함이 좀 더 와닿았던 것 같아요.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이런 운동이 있었기에 내가 이렇게 무지하고도 안전한 사람으로 자랄 수 있었던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또 한편으론, 운동의 분위기가 많이 교체된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아버지는 폭력의 시대에 운동을 하셨지만, 지금은 응원봉 흔드는 풍경부터 시작해서 완전히 다른 종류의 운동이 많잖아요. 그 광경을 멀리서 민주가 바라보는 기분은 어땠는지, 아버지는 또 이런 일들에 대해 뭐라고 하셨는지도 궁금했어요.
처음에 계엄 뉴스를 봤을 때, 여기 시간으로는 새벽이었나, 아무튼 실시간으로는 못 봤어요. 아침이었는지 밤이었는지, 잠에서 깨니까 계엄 뉴스가 떠 있더라고요. 저희는 서로 전화도 잘 안 하는데, 그때는 바로 아빠한테 전화를 했어요. “아빠, 괜찮아?”라고. 예전에 아빠가 했던 말 중에, 80년대 이후에도 아빠를 감시하는 것 같은 경찰들이 집 근처에 보였던 적이 몇 번 있었다고 하셨거든요. 아마 2000년대 초반이었을 거예요.
그 얘기가 갑자기 같이 떠오르면서, ‘계엄이 터지면 예전에 감옥 갔던 사람들, 민주화 운동했던 사람들 다 블랙리스트 되는 거 아니야?’ 이런 걱정이 드는 거예요. 어린 마음에. 그래서 “아빠, 괜찮아? 계엄 터졌어.”라고 하니까, 아빠는 자고 계셨고, 저 때문에 알게 되셨어요. 그리고 오빠가 경찰인데, 둘이 같이 살거든요. 그래서 “아빠, 오빠 지금 집에 있어?”라고 물어봤어요. 사람들 잡으러 끌려나갔을까 봐, 그게 제일 걱정됐어요. 그렇게 시작됐고요. 멀리서 한국의 비극적인 소식을 들으면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들이 밀려와요. 죄책감도 있고, 그게 제일 크고요. 거기에 있지 않아서, 그 사람들과 슬픔과 분노를 함께 나누지 못한다는 소외감도 크고. 거기서 오는 무력감도 엄청나요.
한국에 있는 분들도 당연히 무력감을 느꼈겠지만, 해외에 있으면 그 위에 또 다른 층위의 무력감이 얹어지는 느낌이 있어요. 그 감정이 너무너무 힘들었고, 거기서 시작된 작업이 최근 작업이에요. 멀리 떨어져 있을 때 다른 사람들과 함께 겪는, 일종의 ‘원격 집단 트라우마’에 대한 작업이랄까요. 근데 그 감정을 처리하는 게 쉽지가 않아요. 지금도 사실 완전히 처리되지 않은 것 같아요.
아버지는 계엄 터진 날 국회 쪽이나 이후의 시위에는 안 나가셨던 거예요?
네, 안 나가셨어요. 저는 속으로 왜 안 나가지 싶어서, 아빠가 혹시 쑥스럽거나, 소외될까 봐 안 나가는 건가 싶어서 응원봉을 보내드렸어요. 집으로. 나가라는 뜻으로요. 근데 끝내 안 나가시더라고요. 아빠는 이제 그게 자기 할 일은 아니라고 느끼시는 것 같아요. 대신 매일같이 뉴스를 틀어 놓고, 젊은 사람들이 나가서 운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되게 기뻐하셨어요. 말로 크게 표현하지는 않지만, 표정에서 보였어요. “이제 내가 할 일은 아닌 것 같고, 지금은 너희 세대의 일이다. 너희 또래 사람들이 진짜 많이 나가더라, 멋있더라”라는 말을 그 당시 거의 매일 하셨던 것 같아요.
되게 물려주듯이 하신 말 같아요. 정말 열심히 싸운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도 들고요.
그때 아빠도 20대 중후반이었으니까요.


저도 신작을 봤는데, 되게 쓸쓸하고, 잔여된 감각 같은 것도 느껴졌어요. 남은 부스러기들을 슥슥 모으는 마음이기도 하고, 속상한 마음도 있고. 저는 그게 되게 궁금하거든요. 대상이 없는 상태에서 대상을 찍으려 할 때, 사진가의 난처함이 있잖아요. 상실, 애도 같은 ‘할 수 없는 일들’을 자꾸 소환해야 할 때. 그럴 때 민주에게는 어떤 고민이 있고, 어떻게 이미지를 찍게 되는지 궁금했어요. 많은 사진가들이 비슷하게 고민하는 지점 같기도 해서요.
너무 개인적인 감정인 것 같아요. 상실이나 슬픔 같은 감정은 모두가 경험하지만, 내 성질과 저 사람의 성질이 다르듯이, 같은 ‘상실’이라도 결이 다르잖아요. 아빠 작업처럼 모두가 기억하는 역사적인 사건이 있고, 기록으로 남아 있는 이야기가 있는 경우랑은 또 다르고요. 처음에는 ‘공통점을 찾아야 하는 거 아닌가, 내 감정을 너무 개인적으로만 가져가면 안 되지 않을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상실로 만들어야 하지 않나’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어느 순간, 이게 완전히 내 개인적인 게 되어버리면 사람들이 굳이 이해하려 들지 않고, 그냥 받아들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오히려 더 개인적으로 해석하려고 했어요. ‘무언가를 포착한다’기보다는, 내 개인적인 형상을 만들어내는 데 집중했던 것 같아요.
그게 좀 인상적이었어요. 또 제가 눈여겨봤던 건, 민주가 글쓰기도 진심인 것 같다는 점이었거든요. 작업을 책임지려는 태도, 스테이트먼트를 어떻게든 제대로 쓰려는 마음이 보였어요. 저는 사진가들 스테이트먼트가 대체로 너무 무책임하다고 느낄 때가 많거든요. 근데 민주가 스테이트먼트를 쓸 때는, ‘쓰는 사람 같다’라는 생각이 들어요. 스테이트먼트를 쓸 때, 사진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가는지도 궁금했어요. 사진을 먼저 찍고 글을 쓰는지, 이야기를 먼저 짓고 사진을 찍는지. 글과 사진을 매칭시키고 발전시키는 방식이요.
사실 제 작업 방식은, 이미지를 먼저 다 만들어놓고, 그 안에서 제가 하고 싶은 얘기를 찾는 거예요. 역순이에요. 처음부터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고 싶다’가 분명한 편이 아니라서, 학교 다닐 때는 스케치를 못 만들어서 교수님한테 많이 혼나기도 했어요. “왜 스케치를 안 가져오냐, 기획안을 가져와라” 이런 식으로요. 근데 저는 항상 스케치는 못 하겠다. 나는 이미지를 먼저 가져오겠다고 했고, 그걸 이해해 주는 분도 있고 아닌 분도 있었어요. 저는 일단 어딘가에 앉아서 이미지를 먼저 생각해요. 그러다 머릿속에 이미지가 떠오르면, 그걸 찍으러 가고, 여러 장을 모은 다음에야 ‘아, 내가 이런 얘기를 하고 싶었구나’를 알게 돼요. 그다음에야 글을 쓸 수 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게 진심이기도 하고, 한편으론 어떤 책임감 같기도 해요. 사진들이 다 제 자식 같은 것들이라, 흩어지게 두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래서 글로 잘 묶어두고 싶은 욕망이 커요. 근데 글을 너무 구체적으로 쓰면, 작업이 재미없어지잖아요. 거기서 조절을 해야 하는데, 글 쓸 때는 그 조절이 잘 안 돼요. ‘내 사진이 설명을 잘 못 해주는 것 같다’라는 느낌이 들면, 글이 자꾸 길어지고, 세세해지고. 이몽 작업 때는, 제 기준으로는 글을 되게 짧고 단조롭게 썼어요. 일부러 조금 무책임하게 썼다고 해야 할까요. 사진들이 알아서 설명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기 때문에요. 반대로 최근 작업인〈are you at peace?〉는, 사진들이 설명을 충분히 못 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에 글이 길어졌어요. 더 구체적으로 적게 되고.
저도 가족을 찍은 작업 스테이트먼트가 진짜 짧거든요. 그래서 민주 말이 되게 공감돼요. 어떤 때는 세세하게 쓰고, 어떤 때는 정말 무책임할 정도로 툭 써버리고. 사진과 글의 관계가 참 재밌다는 생각이 들어요. 또 한 가지 궁금했던 건, 민주 작업을 보면 특정 작가를 따라간다거나, “이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라는 느낌이 거의 없어서, 그게 재밌었어요. 어떤 것들에 영향을 받아서 작업이 전개되는지도 궁금했어요.
말씀하신 것처럼, 딱 한 명 꼽을 수 있는 ‘제일 좋아하는 작가’는 없어요. 누가 제일 좋냐고 물으면 잘 떠오르지도 않고. 이몽 작업 전까지는 이미지를 보는 걸 되게 좋아해서, 사진만 봐도 “이건 누구, 저건 누구” 말할 수 있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을 준비하면서부터는, 제가 누군가를 따라 할까 봐 겁이 나서 이미지를 보는 걸 멈췄어요.
내 방향을 먼저 찾고, 그다음에 다시 이미지를 보자는 생각이었어요. 그래서 일부러 안 봤고, 지금도 잘 안 보려고 해요.
그래도 최근에 배우고 싶다고 느끼는 건, 제 기준에서 ‘사진적인 사진’과 ‘파인아트적인 사진’이 따로 있는 것 같거든요. 볼프강 틸만스(Wolfgang Tilmans)는 파인아트적인 사진에 더 가까운 것 같아요. 저는 그쪽과는 아예 다른 판에 있는 것 같고, 그렇다고 전통적인 사진을 하는 것도 아니고, 애매한 지점에 있어요. 그래서 틸만스 작업을 보면서 어떻게 이런 식으로 할 수 있지 생각하고 배우려고 해요. 정확히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요.


저는 파리에서 틸만스 전시 크게 한 걸 한 번 봤거든요. 현장에서 보면, 이 사람이 사진을 좋아한다, 그게 그냥 너무 분명하게 느껴져요. 복잡하게 개념을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내키는 대로 찍고, 배치하고, 사진에 쾌가 있어서 하는 사람’ 같달까요. 학구적이거나 연구자적인 느낌보다, 그냥 사진이 재밌어서 하는 사람. 그게 정말 강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저는 그게 되게 재밌었어요. 이렇게까지 사진의 쾌만 쫓을 수 있구나, 싶기도 하고.
저도요. 그게 너무 부러웠어요. 그 재능이. 운도 좋았겠지만, 지금까지 없었던 방식으로 사진을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사진 한 장, 한 장이 따로 소리 내는 게 아니라, 여러 장과 오랜 시간이 겹치면서 사진들끼리 서로 얘기하는 느낌이랄까. 그게 되게 부러웠어요. 나는 한 장 한 장 찍으려고 그렇게 고민을 하는데, 이 사람은 여러 장을 붙여 놓고도 사진들끼리 소리를 내게 하잖아요. 그게 신기했어요.
맞아요, 웅성웅성한 느낌. 또 놀랐던 건, 전시장 미니어처를 직접 만들어서, 자기가 작게 프린트한 사진들을 계속 배치해 본다는 거였어요. 되게 설계적인 사람이구나 싶었어요. 사진이 사진끼리 떠들 수 있는 환경을 고민하는 사람만 할 수 있는 레이아웃이 너무 많아서, 이건 진짜 난 사람이다 싶더라고요.
교수님이 딱 그렇게 말했어요. 난 사람이라고. 너무 부럽다고, 저 사람은. 심지어 백인 남자잖아요. 거기서 오는 약간의 자괴감도 있고요. 최근에 그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거 보셨어요? 볼프강이 학생들한테 강의하면서 했던 말에 대한 논쟁 글.
볼프강 틸만스를 보면, 자기가 낸 골딘 같은 전통을 찬양하면서 생기는 에너지까지도 아는 것 같고, 낸 골딘이 팔레스타인 관련해서 얘기할 때 영상 찍어 올린 것도, 이 사람 진짜 펄펄 뛴다, 웃기네…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좋은 의미로요. 멘트며, 태도며. 그냥 잘한다 싶었어요.
맞아요. 쇼맨 같은 느낌이 있어요.
어, 잘한다. 근데 이상할 정도로 밉상이 아닌 게 신기해요. 백인 남자 작가 보면 ‘밉상일 법도 한데’ 싶은 순간이 있는데, 틸만스는 이상하게 잘 피해가는 부분이 있어요. 그게 신기해요.
맞아요. 그 논쟁 글에서 제일 위에 있던 댓글이, 볼프강을 한 번 만났다던 학생의 댓글이었는데, “네가 말하고 있는 그 사람이 딱 너였다. 나한테는.” 이런 식으로 쓰여 있었거든요. 그런데 또 그 밑으로는 “너가 볼프강을 잘못 봤고, 이 사람은 항상 어떤 얘기를 하는 사람이고…” 같은 댓글들이 줄줄이 달리고. 그 상황 자체가 되게 웃겼어요. 사실 그 논쟁 전체가 좀 웃기기도 했고요. 논쟁적인 건 항상 흥미롭죠.
저는 또 궁금했던 게, 네덜란드라는 국가에서 사진을 공부한 경험이 어땠는지예요. 한국이랑 다를 것 같기도 하고, 또 왠지 비슷할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좀 상상이 안 가서요.
일단 네덜란드 자체가 실험 예술 성향이 굉장히 강하고, 특히 제가 다녔던 게릿 리트벨트 아카데미는 학교가 네덜란드 안에서도 그게 제일 심해요. 그래서 과별 차이가 거의 없을 정도예요. 과를 나누는 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미디엄의 제한이 없어서, 다 같이 섞여 있어요. 저희 반만 봐도, 학생이 저까지 6명이었는데 그중에 사진을 하는 사람이 둘밖에 없었어요. 다른 친구들은 다른 미디엄을 하거나, 이미지만 쓰지, 사진을 본격적으로 하진 않았어요. 그게 주는 외로움이 좀 있었어요. 저는 그래도 한국에서 어느 정도 사진을 배운 상태였기 때문에, ‘사진을 배우고 싶다’는 욕구가 너무 크지 않아서 버틸 수 있었는데, 만약 처음 사진을 시작하는 사람이었다면 정말 힘들었을 것 같아요. 가르쳐주는 커리큘럼이 거의 없거든요. 그냥 본인의 작업을 계속해서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구조예요.
커리큘럼이 없다는 점, 교수님이라기보다 ‘튜터’라고 불리는 선생님이랑 1:1로 계속 대화하면서 피드백을 주고받는 구조, 다른 과 학생들과 섞여야만 하는 환경. 이런 것들 덕분에 시야가 넓어지는 경험은 확실히 있었어요. 근데 한편으로는, 사진이라는 매체가 많이 희석되는 느낌도 있어요. 사진이 그렇게 중요한 매체로 고려되는 환경이 아니고, 네덜란드 사진 자체가 전통 사진과는 거리가 멀거든요. 제가 하는 것처럼 사진 한 장, 한 장에 이야기를 넣는 방식과는 정말 멀어요.
그래서 “내가 여기서 공부하는 게 잘하는 선택인가?”라는 의심이 몇 번 들기도 했어요. 그래도 새로운 걸 많이 경험했고, 그 안에서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을 다시 써볼 기회도 생겼다는 점에서는 많이 배웠어요. 한국도 사실, 사진 교육은 잘하는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정통 사진을 사랑해서 그래. (웃음)
그런가 봐요.
미국 가면 또 완전히 달라질 것 같아요. 사진을 대하는 방식이.
그래서 너무 가보고 싶어요. 거기는 또 다큐멘터리 기반이잖아요. 저는 제 사진 정의를 ‘다큐멘터리와 연출 사이’쯤이라고 생각하는데, 미국에 가면 내 사진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아직 잘 모르겠어요. 오히려 그 다큐멘터리적인 사진을 한 번 제대로 배워보고 싶은 마음도 있어요.
진짜, 또 한 번 변곡점이 생기겠네요. 최근에 포토보그 선정된 것도 봤는데, 그건 포트폴리오 리뷰를 해주는 프로그램이었던 거예요?
네. 선정 작가들에게 지원하는 프로그램으로 포트폴리오 리뷰가 있었어요. 큐레이터, 작가, 디렉터 같은 사람들 세 명을 한 작가에게 매치해서, 1:1로 리뷰를 하는 형식이었어요.
그게 너무 궁금했어요. 어떤 리뷰를 받았을지. 저는 포토보그라고 해서 패셔너블한 사진들이 많이 발탁될 줄 알았는데, 민주 작업이 선정된 걸 보고 “어떤 피드백을 받았을까?” 궁금했거든요.
포트폴리오 리뷰는 메인 행사랑은 약간 별개였고, 지원 프로그램에 가까웠어요. 1인당 25분밖에 시간이 없었거든요. 정말 짧아요. 제 작업 설명하다 보면 끝나버리는 정도. 그래서 어떤 리뷰어는 “이 시간을 포트폴리오에 대한 평이라기보다, 인맥 쌓는 시간으로 생각하는 게 좋다”라고 하더라고요.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 세 분 중 한 분은 미국 베이스, 한 분은 이탈리아의 PH 뮤지엄 디렉터, 한 분은 우연히도 한국인 큐레이터였어요. 한국인 피드백은 확실히 좀 다른 느낌이 있었어요. 보는 방식, 가치를 두는 포인트가 다르달까. 그 차이를 느끼는 것도 재밌었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한국에서는 감성적인 서사를 많이 따라가는 편인 것 같고, 해외 리뷰어들은 전체적인 틀이나 구조를 더 많이 보는 느낌이었어요.
그렇구나. 저도 이번에 어퍼쳐 관계자들 만나면서 비슷한 걸 느꼈어요. 서사보다 그냥 “재미있다, 흥미롭다”에 집중하는 태도. 배움이 일어나든 말든, “니 사진 흥미롭다”가 먼저인 거예요. 그게 재밌었어요. 한국 사람들이 사진을 피드백하는 방식이랑 진짜 다르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한국 사람들은 너무 세세하게 봐요. 제가 설명하면서도 기가 빨릴 정도로. “내가 분명히 만든 사진인데, 저걸 어떻게 했더라… 왜 저걸 물어보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로요. 서사에는 그렇게까지 관심이 없는 것 같다는 말씀, 맞는 것 같아요.



진짜, 아시아와 비(非)아시아가 사진을 보는 태도가 다르고, 일본만 해도 사진을 대하는 방식이 많이 다르잖아요. 요즘엔 그런 ‘국가적인 시선’들, 사진을 보는 방식 자체가 좀 흥미롭게 느껴져요. 그래서 얼추 제가 궁금한 것들은 다 물어본 것 같고, 이제 차기작이 조금 궁금해요. 생각하고 있는 다음 작업이나, 앞으로 어떤 이야기를 해보고 싶은지, 작가로서 본인의 키워드 같은 게 있다면 뭔지도 듣고 싶어요.
지금 준비하고 있는 프로젝트는, 북유럽이나 유럽 쪽에 살고 있는 한국인 입양자를 만나보고 싶은 프로젝트예요. 이게 작업으로 발전할지 안 할지는 사실 만나봐야 알 것 같고, 그냥 한 번 만나서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예요. 요즘 한국 드라마나 영화에 보면, 입양자가 아니라 이민자 2세대 이야기가 많이 나오잖아요. 그 사람들이 만드는 ‘한국적인 콘텐츠’를 보면, 한국에서 태어난 제가 봤을 때 “어딘가 어긋나 있고, 좀 다른데?” 싶은 지점들이 있어요. 한국 문화에서 변형된 게 아니라, 그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한국인 입양자들은 어떨까?’가 궁금해졌어요. 한국 부모도 없고, 한국에서 자라지도 않았고, 한국에 와본 적도 없을 텐데, 그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는 어떻게 다를까. 그게 궁금해서, 일단 한 분을 섭외해 둔 상태예요. 그분 어머니가 한국인 입양자이고, 본인은 덴마크에서 자란 친구거든요. 그 친구를 만나러 덴마크에 한 번 가보고, 그 이후에야 이게 작업이 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있을 것 같아요.
너무 미묘하고 흥미로운데요.
재미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 요즘 한국에 대해 ‘비껴나간 감각’을 많이 느끼거든요. 저는 너무 한국 사람이니까, 한국이 너무 미화된 것에서부터 시작해서, 진짜 민주 말대로 새로운 세상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이야기들이 너무 궁금해요.
잘 됐으면 좋겠어요. 혹시 그 드라마 〈내가 예뻐진 그 여름 The Summer I Turned Pretty〉 보셨어요?
아뇨, 그게 뭐예요?
원래 소설이었는데, 제니 한이라고 아세요?
들어본 것 같아요.
젊은 여자애들이 좋아하는 미국 작가인데, 한국계 미국인이에요. 항상 한국계 미국인 시점을 베이스로 글을 쓰거든요. 그게 드라마로 제작됐는데, 엄청 화제가 됐어요. 사실 조금 오글거리긴 하지만, 되게 재밌어요. 거기서 주인공이 한국계 미국인이라서, 가끔 ‘할머니’, ‘할아버지’, ‘오빠’ 같은 단어들을 영어 문장 안에 섞어서 쓰거든요. 한국인이 보면 너무 오글거릴 정도인데, 한편으론 “저렇게까지 문화로 자리 잡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너무 신기해서, 입양자들 이야기에 더 궁금증이 생겼어요.
저도 셀린 송이 찍은 영화들 보면서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한국이 아닌데, 어떤 다른 한국을 만들고 있다는 느낌. 그래서 그런 게 흥미롭더라고요. 민주는 어떤 작가들에 대해 말할 때는 키워드가 퍽퍽 떠오르는데, 정작 본인 키워드를 뽑으라면 뭐라고 할 것 같아요? 이미지의 서사성…?
잘 모르겠어요. (웃음) 아직은 규정되지 않는 게 더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더 재밌어요. 민주 특유의 이미지적 분위기는 이미 있으니까요.
제가 찾은 건, 일단 ‘개인적인 이야기’를 항상 한다는 점이에요. 근데 약간 속임수 쓰듯이, 개인적인 이야기로 시작해 놓고, 제일 뒤통수에는 항상 시스템 얘기를 하고 싶어 해요. 아빠 이야기를 하면서 구조적인 문제, 사회 전반의 구조적인 문제를 말하고 싶었고, 최근 작업에서는 내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면서도, 한국인들 모두가 갖고 있지만 쉽게 치유되지 않는 세대적·집단적 트라우마에 대해 말하고 싶었고요. 입양인들 이야기는, 한국 전쟁 이후 입양이 이뤄지는 과정에서 있었던 여러 비리들, 예를 들면 ‘입양인들을 중유럽 국가로 보내고 나면, 한국 입양 기관에서 감사 편지를 쓰고, 그 나라에서 지원금을 보내고…’ 같은 구조를 떠올리면서 시작했어요. 한국은 ‘보내는 나라’이고, 그쪽은 ‘받는 나라’이고, 사람들은 콘텐츠이자 택배처럼 이동되는 거죠. 그 구조 안의 문제를 같이 다룰 수 있지 않을까, 거기서 출발하기도 했어요.
충분히 민주만의 골조를 만들고 있는 것 같아서, 작업이 재밌어요. 최근에 아르코 때문에 베를린에서 활동하는 작가님을 만났는데, 아르코 기금 받아서 한국에서 전시를 하시더라고요. 올해나 내년에 민주도 한 번 한국 와서 전시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발, 뭐가 됐으면 좋겠어요. 저도.
와서 사진도 보여주고, 민주 작업을 아는 사람들이 더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열심히 신청서 써볼게요. 어플리케이션만 써도 뭐가 됐으면 좋겠네요. 한국에 있는 공모들도 계속 지원하고 있거든요. 뭐 썼는지 기억도 안 나요. 지금 제 풀타임 직업이 지원서 쓰는 거라서요. 너무 많이 써서 뭐를 냈는지 잘…
좋아요. 어디선가 교차되는 하루가 있으면 좋겠네요. 한국 오면 밥 사줄게요.
맛있겠다. (웃음)
작가 소개
민주 minjue
서울에서 태어나 현재 암스테르담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사진가이다. 그녀는 역사적 사실에서 출발한 가상의 서사를 이미지로 구성하며, 소설을 쓰듯 사진을 만든다. 공동체 안의 개인들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하고, 무엇이 사회를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 질문한다.
www.kminjue.com

